
삼국의 역사는 공개적으로 검증되었는가
— 삼국사와 중국 정사로 다시 살펴보는 고대사 영역
어느 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든 출발점은 땅, 곧 영역이다.
오늘날 역사 교과서가 삼국의 위치와 영역을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것도
우리 선조의 삶이 그 땅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필자가 그동안 사서 원문과,
많지는 않으나 현재 지도에 남아 있는 옛 지명을
연결하여 써 온 글을 편견 없이 읽으신 독자라면,
오히려 교과서 지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사서가 가리키는 영역은 황해를 둘러싼 땅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이 아니다.
사학 밖의 여러 분야 학자들과 수많은 비전공 역사연구자들이
오랫동안 異見(이견)을 제시해 왔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구리·백제·신라의 영역이 사서의 기록대로 연구되었는지,
그 지도의 지명과 국경이 고대 사서와 얼마나 부합하는지 따로 검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학과 국가 연구기관을 장악한 사학계는 철옹성 같은 담합으로 이러한 문제 제기를 눌러 왔다.
역사는 국가와 그 구성원의 정체성을 세우고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건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삶의 현장과 맞아떨어져야 생명력을 얻는다.
삶의 현장이 달라지면 문화는 물론 사람의 인식체계까지 달라진다.
그러므로 역사는 특정 연구집단의 독점물일 수 없고,
그 땅에 사는 모든 이의 공동자산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런 검증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다.
별자리 운행 법칙을 연구한 천문학자의 과학적 연구조차 부정되었다.
사학은 통설이라는 이름으로 담합의 장벽을 쌓은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는 특정 이론으로 구축하는 학문이 아니라
기록을 재현하는 학문이다.
지금이라도 검증의 원칙을 세우고 사서의 기록을 재현해야 한다.
‘삼국사’에는 삼국의 건국과 전쟁,
도읍의 이동과 멸망이 기록되어 있고,
지나의 역대 정사에는 삼국의 위치와 주변국,
산천과 군현이 기록되어 있다.
두 사료는 관점이 달라 같은 시대를 두고도 다른 내용이 적지 않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옛 지명이
산천을 추정할 징검다리가 되어 준다.
각 기록을 독립적으로 검토하고 서로 비교하면
고대사의 지리적 실체를 검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북극성처럼 기준이 되어야 할 기록이 하나 있다.
최치원이 남긴 「上太師侍中狀(상태사시중장)」이다.
1. 최치원은 삼국의 활동 공간을 한 문장으로 압축
‘삼국사’ 권46 최치원전은 최치원 문집에 실린 「上太師侍中狀(상태사시중장)」을 인용하고 있다.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으니 마한·변한·진한이며, 마한은 고구리,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다.
사학자들이 흔히 주목해 온 것은 이 삼한과 삼국의 대응 관계이다.
그것이 정치적 계승인지 지리적 영역의 계승인지는 따로 따질 문제이나,
삼한과 삼국을 별개의 역사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정보는 이어지는 문장에 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고구리와 백제가 전성기에는 강병이 백만이어서,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 문장에는 삼국의 활동 공간을 직접 가리키는 지명이 등장한다.
오·월은 지나 대륙 남쪽의, 유·연·제·노는 북쪽과 동쪽의 역사적 지역 명칭이다.
물론 이 지명들을 현재 행정구역에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다.
시대에 따라 중심 위치와 범위가 달라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치원이 고구리와 백제의 군사 활동을 말하면서
오월과 유연제로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통설처럼 일시적 원정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나라의 생멸이 바로 그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확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사적 표현인지,
실제 전쟁과 政體(정체)의 관계를 반영한 것인지 판단하려면,
안에서 본 ‘삼국사’의 전쟁 기록과
밖에서 본 지나 정사의 기록을 한 평면에 놓고 검토해야 한다.
2. ‘삼국유사’는 최치원의 기록을 반만 인용
일연의 ‘삼국유사’ 권1 마한조에도 최치원의 견해가 나온다.
崔致遠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리이고 진한이 신라라고 하였다.
‘삼국유사’는 여기에 해설을 붙여 삼한과 삼국의 관계를 풀이한다.
그러나 ‘삼국사’는 같은 최치원의 글에서 삼한과 삼국의 대응뿐 아니라
오월과 유연제로의 기록까지 전한다.
그렇다면 삼한의 위치를 검토할 때에도
이 지명들과의 관계를 함께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최치원의 문장을 곧바로 삼국의 영토 범위로 읽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검증 대상에서 뺄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일연스님은 오월과 유연제로의 문구를 외면했다.
앞 문구를 보고 뒤 문구를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고구리보다 작은 영토에 살다 보니
유연제로와 오월 정벌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삼국유사’에는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 대목도 많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예로,
소제목은 낙랑국인데 내용은 낙랑군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역사이야기를 쓴
기이 1, 2편이 모두 59항목 가운데
고구리는 하나, 백제는 세 항목에 불과하여
신라에 크게 치우쳐 있는데도,
‘삼국’을 내세운 탓인지 ‘삼국사’보다 값진 내용을 전하였다고
억지 평가의 빌미가 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는 자료가 부족한 국사 연구에 다소 도움이 되었으나,
「上太師侍中狀(상태사시중장)」의 결정적 대목을 무시함으로써
고대 지리를 복원하는 출발점에 찬물을 끼얹었다.
다른 글에서 밝혀왔고, 계속 밝히겠지만,
이 사실은 우리 역사를 참담하게 무너뜨린 단초가 되었다.
이제 ‘삼국유사’가 인용하지 않은 구절을 나침반으로 삼아,
우리 역사의 영역을 검증할 자료와 방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지나 정사는 우리가 모르는 용어를 정의했다
3-1. 지나 정사에 기록된 요동과 요서, 그리고 요양
지나의 나라들은 우리를 타자나 적대 대상으로 보았기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기록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바깥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우리 고대 영역을 찾아가는 귀중한 등불이 된다.
‘송서’ 권97 백제전에는 다음 문장이 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는 본래 고구리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는데, 그 뒤 고구리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양서’ 권54 백제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백제는 본래 고구리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고구리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두 기록은 백제의 활동 공간을 검토하는 결정적 자료이다.
그런데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사서의 요동과 요서는 실제로 어디였는가?
오늘날 역사 지도를 기준으로 요동을 먼저 고정하고 기록을 해석하면,
출발점이 틀렸을 경우 관련 지명까지 연쇄적으로 잘못 비정된다.
따라서 요동과 요서의 위치는 ‘송서’·‘양서’에만 기대지 말고,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의 수계·군현·전쟁 기록으로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특히 요수의 위치, 진나라 장성과 요동의 관계, 요서의 군현,
고구리와 백제의 전쟁 경로를 함께 살펴야
백제의 요서·진평 기록이 지닌 지리적 의미가 드러난다.
또한 강은 북쪽을 陽(양), 남쪽을 陰(음)이라 하고,
산은 반대로 남쪽이 양, 북쪽이 음이다.

요수의 북쪽이면 요양이 되고,
산음은 어떤 산의 북쪽을 가리킨다.
左(좌)는 동쪽을 뜻하여 강좌는 강의 동쪽이다.
그러니 반금시로 흐르는 강을 요하라 한다면
요녕성의 요양은 이 상식에서 벗어난다.
그 요양은 억지인 셈이다.
3-2. 백제 멸망의 긴 그림자
백제는 뜻밖에 많은 지명을 남겼다.
고구리의 갈래로서 마한의 땅을 빌려 건국했고,
집안 형제가 다투듯 고구리와 자주 싸워 전투 지명을 남겼으며,
맞닿은 신라와의 갈등에서도 지명을 남겼다.
무엇보다 라당연합군에 맞서 끈질기게 나라를 되찾으려 한 싸움에서 많은 지명을 남겼다.
그러나 대륙에 있어야 할 지명을 남의 다리 긁듯
한국 땅에서 억지로 해석하느라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백제의 위치를 밝히는 데에는 멸망이 남긴 그림자,
곧 그 뒤의 기록이 중요하다.
‘구당서’ 권199상 백제전은 백제 왕족의 후계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絕
그 땅은 이때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였고,
백제의 계통은 마침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자손의 행방보다 그 땅이 누구에게 귀속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단서이다.
다만 발해의 건국은 백제 멸망보다 한참 뒤이므로,
이를 660년 멸망 당시의 영토 분할로 읽을 수는 없다.
‘구당서’가 기록한 대상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백제의 땅이 교과서 지도처럼
압두남(압록강·두만강 이남을 이르는 필자의 용어)에 있었다면,
발해와 신라가 이를 나누어 가질 수 없었음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사학계는 이 기록을 외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 말장난을 늘어놓는다.
이 기록은 교과서 지도에 담을 수 없다.
백제 영역과 신라·발해말갈 영역의 지리적 관계,
그리고 이 기록이 백제 옛 땅 전부를 말하는지 일부를 말하는지 밝히려면,
멸망 때의 전쟁 경로, 당나라의 군사 거점,
신라의 점령 지역, 발해의 성립과 영역 변화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야 한다.
3-3. 당나라가 백제 땅에 두었다는 다섯 도독부
‘신당서’ 권220 백제전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땅을 독차지하려고 설치한 행정구역의 이름이 나온다.
乃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이에 백제 땅을 나누어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의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이 다섯 지명은 멸망 당시 백제 영역의 중심을 검증할 중요한 단서이다.
그동안 백제의 위치는 웅진과 사비 같은 도읍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마한·동명·금련·덕안 역시 도읍에 버금가는 넓은 지역의 거점이었을 것이다.
다섯 도독부의 위치를 각각 독립적으로 탐색하고
서로 어떤 공간 관계를 이루는지 확인해야 하며,
특히 동명과 덕안이라는 이름이 다른 시대에 어디에 나타나는지도 조사해야 한다.
물론 이름(지명)이 같다고 같은 장소라 단정할 수는 없다.
같은 이름의 지명은 여러 곳에 있을 수 있으므로,
설치 시기와 관할 관계, 주변 산천과 군현의 명칭,
지명의 연속성을 함께 따져야 한다.
이러한 교차 검증으로 다섯 도독부의 위치를 복원한다면
백제가 멸망한 지역도 한층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3-4. 백제의 전쟁 기록은 올바로 검토되지 않았다
백제의 마지막 전쟁 기록은 도읍의 위치만 알려 주지 않는다.
‘삼국사’와 ‘구당서’·‘신당서’에는 당군의 출병과 백제의 방어,
주요 성곽의 함락, 의자왕의 이동,
부흥군의 저항이 기록되어 있고,
하나하나에 지리적 조건이 담겨 있다.
군대가 어디서 출발해 어떤 물길로 움직였는지,
어디서 상륙하거나 강을 건넜는지,
어느 성을 먼저 공격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군대의 이동거리는 중요한 검증 기준이다.
대군은 병사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군량과 무기, 수송 인력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므로 전쟁 경로는 행군 속도와 보급 조건,
강과 산맥의 분포를 고려하여 검토해야 한다.
어떤 비정이 사서의 사건 순서와 이동 방향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행군을 요구한다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
반대로 여러 사서의 전쟁 기록이 한 공간에서 모순 없이 이어진다면 그곳은 유력한 후보지가 된다.
4. 역사 지명의 흔적을 연구하려면
앞에서 지명을 많이 남긴 백제를 예로 들어,
삼국의 영역을 나타내는 지명이 어떻게 남아 있고
현재 지도에서 사건이 어떻게 재현될 수 있는지 더듬어 보았다. 이를 정리해 보자.
고대 지리 연구에서는 지명 하나를 잘못 비정하면 다른 지명들까지 함께 틀어진다.
요동의 위치를 정하면 요서와 요수의 관계가 문제 되고,
웅진의 위치를 정하면 백제의 다른 성곽과 당군의 진격 방향까지 설명해야 한다.
강에는 상류와 하류가 있고,
산맥은 지날 수 있는 길을 제한하며,
성곽은 지켜야 할 교통로와 맞물린다.
그러므로 고대 지명의 위치는 현존 지명의 유사성보다 지명들 사이의 관계로 검증해야 한다.
이 원칙에 따라 두 가설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오늘날 교과서가 쓰는 삼국의 위치와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오월·유연제로 기록과
지나 정사의 요동·요서 기록을 중심으로 복원하는 공간이다.
어느 쪽이 사서 원문을 더 잘 설명하는지,
전쟁 경로와 이동거리가 성립하는지,
지명과 수계가 맞는지,
후대 행정구역 변화와 이어지는지를 따져야 한다.
기존 비정이 사료와 맞으면 인정하고,
새 가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기록이 나오면 그 역시 고쳐야 한다.
역사 연구의 목적은 정해 놓은 지도를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사료에 부합하는 지리를 복원하여 기록을 재현하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5. 우리 역사 검증은 인식 전환이 선행되어야
이 글에서 인용한 기록만 보아도 시대와 시각이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특정 문장 하나로 곧바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지만,
같은 공간을 설명하는 자료라면 서로 대조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동안 고대사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후대에 굳어진 지명 비정과 사료 원문의 관계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검증되었는지 되물어야 한다.
삼국의 역사가 어디에서 펼쳐졌는가는
현재의 지도만으로 확정할 문제가 아니다.
당대와 가까운 시대 사람들이 남긴 지명과 전쟁 기록,
산천과 군현의 관계를 지루하더라도
하나씩 복원할 세세한 자료가 있는데도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최치원의 오월·유연제로 기록처럼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야 비로소 검증을 시작할 수 있는 놀라운 기록도 있다.
‘삼국사’와 지나 정사의 동이 관련 기록을 대조하여
어느 공간에서 더 많은 사실이 모순 없이 설명되는지 확인하는 일,
그것이 삼국의 실제 활동 공간을 밝히는 길이다.
주요 사료
• ‘삼국사’ 권46, 열전 제6, 최치원전 「上太師侍中狀(상태사시중장)」
•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마한조
• ‘송서’ 권97, 열전 제57, 백제전
• ‘양서’ 권54, 열전 제48, 백제전
• ‘남제서’ 권58, 열전 제39, 백제전
• ‘구당서’ 권199상, 동이열전, 백제전
• ‘신당서’ 권220, 동이열전, 백제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