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야구기자협회(BBWAA)가 올해부터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에서 각각 최고의 구원투수 한 명을 선정한다. 선발 뒤를 잇는 불펜투수의 독립 시상이다. 새 상은 최우수선수(MVP), 사이영상 등과 함께 BBWAA의 공식 연말 시상 목록에 올랐다.
신설을 주도한 제이슨 스타크 기자는 지난해 8월 디애슬레틱 기고에서 구원투수가 경기 운영부터 우승 향방까지 과거 어느 때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했다. 스타크는 이 상을 12년 전 처음 제안했으나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올해 양대 리그에서 3명씩 최종 후보가 발표됐으며, 초대 수상자는 오는 11일(미국 현지시간) 공개된다.
짧아지는 선발 등판, 커지는 구원 비중
최근 선발투수의 소화 이닝이 짧아지면서 구원투수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이는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MLB닷컴이 지난 5월 보도한 ‘The hidden reason why velocity levels keep rising’에 따르면 지난해 구원투수는 메이저리그( 전체 투구 이닝의 42.5%를 소화했다. 단축 시즌인 2020년을 제외한 역대 최고치다. 선발 한 명이 긴 이닝을 버티던 야구에서 여러 투수가 나눠 던지는 야구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셈이다.

통계 출처 - 「MLB Starters Now Last About Five Innings, and Complete Games Are Nearly Gone」/ 제작 - 생성현 AI를 활용한 그래프 제작
그 배경에는 한층 거세진 구속 경쟁과 부상 위험이 있다. 메이저리그(이하 MLB)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2008년 시속 91.9마일(약 시속 148km)에서 올해 94.6마일(약 시속 152km)로 높아졌다. 빨라진 구속은 투수들의 부상 위험을 높인다. MLB가 투수·코치·의료진 등 200여 명을 조사해 2024년 발표한 ‘MLB Report on Pitcher Injuries’는 강한 공과 높은 회전수, 전력투구를 추구하는 현상을 부상 위험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했다. 실제 투수들의 부상자 명단 등재로 인한 결장 일수도 2005년 1만3666일에서 2024년 3만2257일로 늘었다. 구속 상승만으로 그 원인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단이 선발투수의 투구 부담을 관리해야 할 이유는 뚜렷해졌다.
같은 타자를 여러 번 상대할수록 선발의 실점 위험이 커지는 점도 교체를 앞당긴다. MLB 공식 용어집 ‘Third Time Through the Order Penalty’에 따르면 2016~2025년 선발투수의 피OPS는 상대 타순을 처음 만났을 때 0.713에서 세 번째 만났을 때 0.780으로 높아졌다. 구단은 투수의 체력 소모와 타자의 적응을 고려해 조기 교체를 선택한다. 남은 이닝의 성패가 중간계투와 셋업맨, 마무리 등 구원진의 손에 넘어가는 이유다.
다시 말해, 빨라진 구속으로 인한 부상 위험도와 타자들의 투수에 대한 적응력으로 인해 구원투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기록상의 공헌을 넘어, 시상대의 주인공으로
신설된 상은 현대야구에서 높아진 구원투수의 가치를 시상 체계에도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MLB는 2014년부터 리베라상과 호프먼상을 통해 양대 리그 최고의 구원투수를 선정해 왔다. 올해 달라진 점은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가 구원투수상을 정규 시상 부문에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MVP와 사이영상 등을 선정해 온 기자단이 구원투수의 활약을 별도의 부문에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구원투수의 활약을 주요 개인상 체계 안에서 독립적인 평가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9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마무리는 물론, 앞선 이닝의 실점 위기를 막는 불펜투수도 팀 승리를 만드는 주역이다. 스타크는 신설 배경을 설명하며 단순한 세이브 숫자를 세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취지를 밝혔다. 투구 이닝이 짧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공헌을 어떻게 평가할지, 야구계가 제도적으로 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549세이브 오승환도 놓친 ‘황금장갑’
한국에서도 시상 제도의 빈틈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6월 3일 공개된 유튜브 ‘사이버 윤석민’에서는 ‘끝판대장’ 오승환(전 삼성 라이온즈)이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언급됐다. 오승환은 선발과 구원을 나눠 시상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한·미·일 통산 549세이브를 쌓은 한국 야구의 대표 마무리투수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적 없다는 사실은 많은 야구팬에게 화제가 됐다.
골든글러브는 KBO가 그해 포지션별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 10명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그런데 투수 부문은 선발과 구원을 나누지 않고 단 한 명을 선정한다. 역할도, 책임지는 이닝도 다른 투수들이 같은 표를 놓고 경쟁한다. 오승환이 47세이브와 평균자책점 0.63을 기록한 2011년에도 골든글러브는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승률 4관왕에 오른 선발 윤석민(전 KIA 타이거즈)에게 돌아갔다. 당시 오승환은 113표를 얻어 윤석민(189표)에 밀렸다. 개인의 성적이 충분했음에도 압도적인 선발과 같은 무대에서 평가받아야 했던 것이다.
전문 구원투수가 투수 골든글러브를 받은 사례는 1994년 태평양의 정명원과 2013년 넥센의 손승락뿐이다. 손승락은 46세이브를 거두고 19년 만에 마무리투수로서 황금장갑을 꼈지만, 당시 평균자책점 1위 찰리 쉬렉(당시 NC 다이노스)과 다승 공동 1위 크리스 세든(당시 SK 와이번스) 등을 제친 결과를 두고 논쟁이 일었다. 이후 13년 동안 구원투수 수상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한 자리를 놓고 다른 역할의 가치를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달라진 마운드, 달라지지 않은 평가 기준
KBO리그에서도 투수 운용의 분업화가 뚜렷하다. 야구 기록 사이트 ‘오야리’가 KBO 정규시즌 경기별 투수 등판 기록을 재집계한 자료 ‘투구 수 제한·이닝 제한은 투수를 보호하나’에 따르면, 팀당 한 경기 등판 투수는 지난 2010년 평균 4.28명에서 올해 4.92명으로 증가했다. 선발투수가 한 경기에서 100구 이상 던지는 비율은 2013년 43.6%에서 2025년 18.6%로 줄었다. KBO리그 역시, MLB와 마찬가지로 구원투수의 경기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통계 출처: https://www.aikball.com/notes/pitch-count-limits / 제작 - 생성현 AI를 활용한 그래프 제작
올해 한국시리즈에서도 구원진의 활약이 승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1차전에서 KT 위즈 박영현은 8-0으로 앞서던 경기가 8-6까지 좁혀진 8회 1사 만루에 등판했다. 그는 1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버텨 8-7 승리를 지켰다. 이튿날 2차전에서는 삼성라이온즈 원태인이 10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동점을 허용했지만 추가 실점을 막아, 삼성 라이온즈의 3-2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선발이 만든 흐름을 마지막까지 승리로 연결하는 과정에 여러 구원투수의 몫이 있었다.
현장에서는 별도 시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진다. SSG 랜더스 소속 노경은은 지난해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현장 취재진에게 투수 부문의 세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선발·중간·마무리투수를 구분해 시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KBO가 지난달 발표한 올해 골든글러브 후보 명단에서도 투수 25명은 여전히 하나의 부문에서 경쟁한다.

박영현과 조병현(SSG 랜더스), 김택연(두산 베어스)처럼 큰 경기에서 제 몫을 해내는 젊은 구원투수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MLB가 새로운 상을 만든 이유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한 시즌 최고의 선발을 뽑는 것과 최고의 구원투수를 기리는 것은 서로 다른 성취를 인정하는 일이다. 현대야구의 승리는 아홉 이닝을 나눠 책임지는 투수들이 함께 완성한다. 시상의 방식도 이제 그 변화를 비출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