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2월 28일 오전 10시 20분 무렵, 이란 남부 호르모즈간주의 작은 도시 미나브. 샤자레 타이예베 여자초등학교 교실에는 일곱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미사일은 그 시간에 떨어졌다. 이란 당국은 이 학교에서만 학생 168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전쟁 첫날의 일이다. 학교 가까이에 혁명수비대 시설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란 유네스코 국가위원회 사무총장은 학교가 두 차례 공격받았다고 주장했다. 사흘 뒤 미나브의 거리는 작은 관을 따르는 수천 명의 조문 행렬로 메워졌다.
그 소식 이후 나는 성경 열왕기 하편을 펼쳤다. 유다 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이 일만 명이었다는 짧은 기록 앞에서 손이 멈췄다. 숫자는 늘 차갑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고, 누군가의 딸과 아들이 있다. 성경은 바로 거기서 묻는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무엇이 먼저 무너졌는가.
칠백 명의 후궁과 두 마리 금송아지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는 기도로 출발한 왕이었다. 그런데 성경 열왕기상 11장은 그가 후궁 칠백 명과 첩 삼백 명을 두었고, 나이가 들자, 그 여인들이 섬기는 신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적는다. 예루살렘 맞은편 산에는 이방 신을 위한 산당이 들어섰다.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여 나라를 찢는 일을 아들의 때로 미루셨다. 미뤄졌을 뿐, 거두어진 건 아니었다.
왕국은 둘로 갈라졌다. 북쪽의 여로보암은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하러 오르내리다 보면 마음이 남쪽 왕에게로 돌아갈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웠다. 겉은 예배였으나 속은 정권을 지키려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은 열아홉 왕을 거치며 대물림되었고, 주전 722년 무렵 사마리아는 앗수르 앞에 무너졌다. 열왕기하 17장은 그 까닭을 짧게 정리한다. 선지자들을 통해 거듭 경고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고 목을 곧게 했다는 것이다.
남쪽 유다는 형편이 나았을까. 여로보암에게 밀려난 레위인들이 유다로 내려왔고, 성전도 그 땅에 있었다. 그래도 산당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역대하 36장은 마지막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이 사자들을 거듭 보내셨으나 백성은 그들을 비웃었고, 마침내 고칠 길이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굳은 마음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예레미야 36장에 있다. 겨울 궁전 화롯가에 앉은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서너 단씩 읽을 때마다 칼로 베어, 불 속으로 던졌다. 두루마리 전체가 재가 될 때까지 그는 옷을 찢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말씀을 태운 손은 머지않아 나라를 태우는 불을 불러들였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죽는 장면을 본 뒤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
강퍅함은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강퍅함은 하루아침의 반역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죄의 속임수가 마음을 서서히 굳힌다고 경고한다. 바로의 마음도 열 번의 재앙을 지나며 단단해졌다. 경고를 들을수록 귀가 두꺼워지는 것, 그것이 강퍅함의 생리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고, 다음에는 익숙함이며,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자리를 따라가면 세 갈래 공통점이 드러난다. ▶첫째, 하나님 대신 손에 잡히는 안전장치를 붙들었다. 이사야는 애굽의 병거와 기병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했고, 시편 기자는 어떤 이는 병거를, 어떤 이는 말을 자랑하나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노래했다. ▶둘째, 신앙을 권력의 도구로 바꾸었다. 여로보암의 금송아지가 그랬다. ▶셋째, 말씀을 전하는 자를 조롱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경고대로, 바람을 심은 자들은 광풍을 거두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셨다고 말한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벼락이 아니라 내버려두심이다. 오늘의 병거와 기병은 미사일과 동맹, 억지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뿐이다.
여덟 달을 넘긴 광풍
이번 전쟁도 갑자기 오지 않았다. 2024년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미사일을 주고받았고, 2025년 6월에는 열이틀 동안의 전쟁이 있었다. 경고는 이미 여러 번 울렸다. 그리고 2026년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숨졌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걸프 지역 미군 기지를 향해 미사일과 드론을 날렸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했다. 헤즈볼라가 가세하면서 레바논도 다시 전장이 되었다. 4월 8일 파키스탄의 중재로 두 주간의 휴전이 성립했지만, 이슬라마바드에서 21시간 동안 이어진 협상은 빈손으로 끝났다. 세계 원유 수송의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량은 한때 전쟁 전의 10분의 1 아래로 떨어졌다. 6월 17일 양측 대통령이 양해각서에 서명하며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서명 21일 만인 7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은 그 합의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란이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 행렬을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공습과 보복이 다시 맞물렸다. 11월 3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하자, J.D. 밴스 부통령은 패배의 이유로 전쟁을 꼽았고, 테헤란은 그 결과를 자신들의 승리로 읽었다. 이란 의회 의장 갈리바프는 미국인들이 전쟁에 반대했다는 글을 올렸다. 협상과 위협이 번갈아 오가는 가운데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쪽에서 들려온 같은 문법
휴전 직전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가 없으면 "한 문명 전체가 오늘 밤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휴전 직후 이란의 새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이것이 "전쟁의 끝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쪽은 파멸을, 다른 쪽은 끝나지 않을 싸움을 말했다. 어휘는 달라도 문법은 같다. 마지막 말은 내 힘이 하리라는 확신이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것도 결국 그 확신이었다.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4월 10일 기준으로 미국에 본부를 둔 인권 단체 HRANA는 이란에서만 3,636명이 숨졌고 그중 민간인이 1,701명, 어린이가 최소 254명이라고 집계했다. 레바논 당국은 최소 1,830명의 사망을 발표했다. 이스라엘에서도 이란과 레바논에서 날아온 미사일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3월 1일 예루살렘 인근 벧세메스에 떨어진 미사일은 아홉 명을 앗아 갔다. 4월 초까지 미군 전사자도 14명으로 집계되었다. 미나브의 아이들과 벧세메스의 이웃들 사이에는 국경이 있으나, 울음에는 국경이 없다.
성경은 신문의 암호표가 아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전쟁을 어느 예언의 성취로 단정하거나 한 나라만 심판의 과녁으로 바로 지목하는 건 옳은 생각이 아니다.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와 이란을 성경 속 이스라엘과 바사에 그대로 겹쳐 읽는 일도 위험하다. 성경은 뉴스를 푸는 암호표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진단서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했다. 무기를 쥔 지도자, 그 무기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 화면 너머에서 전쟁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우리까지, 같은 진단서에 이름이 적혀 있다.
돌아온 42,360명이 먼저 세운 것
폐허가 마지막 장은 아니었다. 예레미야가 예고한 칠십 년이 차자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지금 미사일이 떨어지는 바로 그 땅의 왕이 포로 귀환의 문을 연 것이다. 스룹바벨과 돌아온 회중은 42,360명이었고, 남종과 여종 7,337명과 노래하는 이 200명은 따로 기록되었다. 성전 기초가 놓이던 날, 첫 성전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소리 내어 울었고, 젊은이들은 기뻐 외쳤다. 울음과 환호가 뒤섞여 멀리서는 구별할 수 없었다고 에스라서는 적는다.
훗날 느헤미야와 백성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 그런데 느헤미야 8장에서 가장 깊이 허물어진 것은 돌이 아니라 사람들의 굳은 마음이었다. 에스라가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자, 백성이 울었다. 닫혔던 귀가 열린 것이다. 성벽보다 먼저 다시 세워진 것은 말씀을 듣는 귀였다. 수백 년 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다. 이날에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탄식하셨다. 평화의 길은 늘 가까이 있었으나, 굳은 마음에는 그 길이 숨겨져 있었다.
이슬람권 이웃들 곁에서 스무 해를 산 사람으로서 고백한다. 나는 전쟁 뉴스를 보며 누가 옳은지부터 따지는 데 익숙했다. 그 사이 내 안에도 작은 금송아지가 서 있었다. 내 판단, 내 진영, 내 안전이라는 이름의 우상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할 일은 편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일이다. 미나브의 어머니와 벧세메스의 아버지를 위해 같은 기도로 울어야 한다. 이슬람을 향한 막연한 공포도, 한쪽 편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열광도 복음의 언어가 아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테헤란의 골목에도, 레바논 남부의 무너진 마을에도, 텔아비브의 방공호에도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영혼들이 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의 기도마저 금송아지 앞의 제사가 된다. 성벽은 언제나 마음이 먼저 무너진 뒤에 무너졌고, 회복은 언제나 귀가 먼저 열린 뒤에 시작되었다.
무너진 성벽보다 먼저 굳어 버린 마음, 오늘 당신의 귀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려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