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 한 알에 맺힌 작은 빛이 화면 너머의 하늘로 이어진다. 디지털 임파스토 작가 백종찬의 포도 정물은 탐스럽게 쌓인 과실과 포도주 잔을 전경에 놓고, 그 뒤로 산과 들판, 언덕 위 마을을 펼쳐 보인다. 가까이 있는 사물을 들여다보는 즐거움과 먼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가 한 화면 안에서 만나는 작품이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 왼쪽과 중앙을 넓게 차지한 포도다. 짙은 보라색에서 자줏빛, 투명한 붉은빛까지 이어지는 과실은 둥근 형태를 반복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밝기를 지닌다. 빛을 받은 부분에는 흰색과 연한 청색이 짧고 선명하게 놓이고, 알과 알 사이에는 깊은 어둠이 남는다. 이러한 명암의 차이가 포도송이의 무게와 겹침을 드러낸다.
포도를 담은 그릇은 황금빛이다. 넓게 벌어진 입구와 아래로 좁아지는 몸체, 둥근 받침이 풍성한 과실을 안정적으로 떠받친다. 그릇 표면에서는 노랑과 주황, 갈색과 흰색이 잘게 나뉘며 금속을 연상시키는 반짝임을 만든다. 색채로 표현된 광택은 포도의 매끄러운 표면과 대비되면서, 같은 빛이 서로 다른 사물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오른편의 포도주 잔은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포도와 그릇이 촘촘한 색면으로 채워져 있다면 잔의 윗부분은 배경을 비추는 투명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잔의 테두리와 세로로 이어지는 밝은 선이 형태를 잡고, 아래쪽에 담긴 붉은 액체가 무게중심을 만든다. 가느다란 잔의 줄기는 주변의 밀도 높은 묘사 속에서 특히 또렷하게 읽힌다.
이 잔은 전경과 배경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잔 너머로 이어지는 초록 들판과 어두운 나무, 따뜻한 하늘빛이 유리의 윤곽과 겹친다. 관람자는 잔의 모습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 뒤편 풍경을 보게 된다. 눈앞의 사물에 머물던 시선이 먼 곳으로 옮겨가는 통로가 화면 오른쪽에 마련된 셈이다.

공간의 깊이는 사물의 크기 차이에서 한층 분명해진다. 앞쪽 포도 한 알은 멀리 있는 건물보다 크게 보인다. 그릇과 잔 뒤로 펼쳐진 들판은 점차 작은 색면으로 나뉘고, 산 능선은 푸른색과 보랏빛으로 겹쳐진다. 전경에서는 과실의 윤곽을 따라 움직이던 눈이 배경에서는 길게 이어지는 지형을 따라 흐른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번갈아 보게 하는 구성이 화면에 넓이를 더한다.
왼쪽의 돌기둥과 위에서 내려오는 포도잎은 이러한 풍경의 틀을 이룬다. 밝은 돌의 수직선은 화면 가장자리를 받치고, 여러 방향으로 펼쳐진 잎은 위쪽에서 과실을 감싼다. 잎의 초록색은 포도의 보라색과 맞물리며 색채의 차이를 선명하게 한다. 동시에 배경의 들판과 나무에 이어져, 정물과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돕는다.
하단의 돌턱도 단순한 받침에 그치지 않는다. 그 위에 놓인 작은 포도송이와 낱알은 그릇 속 과실을 화면 앞쪽까지 이어준다. 크고 풍성한 덩어리로 보이던 포도가 작은 단위로 흩어지면서 시선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긴다. 밝은 돌 표면과 포도 아래의 짙은 그림자는 각각의 위치를 드러내고, 화면 가장 가까운 곳에 손이 닿을 듯한 거리감을 만든다.
이 작품에서 따뜻한 색은 전경에만 집중되지 않는다. 먼 하늘의 노랑과 주황이 그릇의 황금빛, 잔에 담긴 붉은빛, 과실의 밝은 부분으로 되풀이된다. 반대로 포도 표면의 청보라색은 산 능선과 하늘의 차가운 색면에 호응한다. 멀리 떨어진 대상들이 색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화면은 여러 사물을 나열한 장면 이상의 통일성을 얻는다.

디지털 임파스토 표현은 이 연결을 눈에 보이는 결로 구체화한다. 포도에서는 둥근 형태를 따라 잘게 나뉜 색면이 빛의 반사를 강조한다. 잎에서는 날카로운 가장자리와 넓은 면이 교차하고, 돌에서는 각진 밝은 조각들이 표면의 거친 인상을 만든다. 하늘에서는 짧은 색의 흔적들이 구름과 빛의 흐름을 이룬다. 같은 화면 안에서도 대상에 따라 질감의 방향과 크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두께와 요철은 이미지 속에 구현된 시각적 질감이다. 실제 물감의 물리적 두께를 확인하는 감상과는 구별되지만, 관람자의 눈은 명암의 경계와 겹쳐진 색면을 따라 표면의 높낮이를 상상하게 된다. 특히 그릇의 밝은 부분과 포도 사이의 어둠에서는 이처럼 보는 감각이 만지는 감각을 연상시키는 효과가 두드러진다.
화면의 풍성함을 만드는 요소는 과실의 양만이 아니다. 투명한 유리와 불투명한 금빛 그릇, 둥근 과실과 각진 돌, 가까운 잎과 먼 산이 서로 다른 성질로 함께 놓여 있다. 그 차이가 촘촘하게 맞물리면서 한 장면 안에 여러 감상의 속도가 생긴다. 처음에는 강한 색에 이끌리고, 다음에는 작은 반사광을 찾으며, 마지막에는 배경의 마을과 능선을 따라 시선이 멀어진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정물의 여백을 만든다. 누가 포도를 담았는지, 누구를 위해 잔을 놓았는지 화면은 설명하지 않는다. 특정한 이야기를 확정하기보다 관람자가 그 자리에 머무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한 잔의 포도주와 과실이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작품은 그 질문을 사물과 풍경의 관계로 풀어낸다.
백종찬의 포도 정물에서 오래 눈에 남는 것은 빛이 머무는 방식이다. 작은 포도알에는 점처럼, 그릇에는 넓은 반사면처럼, 잔에는 가느다란 선처럼 빛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서로 다른 빛은 먼 하늘의 밝음으로 이어진다. 한 알의 과실을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해 넓은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경험, 이 작품의 감상은 그 시선의 이동 속에서 깊어진다.
백종찬 작가 소개
백종찬은 ‘생각의 붓으로 글을 쓰고, 마음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디지털 임파스토 작가다. 부모님과 조부모의 손에 담긴 삶과 사랑을 기록하는 《신의 손》 프로젝트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성화를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