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한정찬 시인의 시 ‘양파를 수확하며 외 4편
양파를 수확하며
줄기가 누워 마른자리,
양파는 둥글게 속을 채운다.
엄동을 견딘 침묵이
한 개씩 영글어 있다.
껍질을 벗겨도 벗겨도
새로운 것이 없는 생애다.
그 결마다 밴 아린 맛이
눈물로 스민다.
양파망 사이는
원고지 한 장이다.
한 줄의 시가
양파처럼
속을 품고 있다.
*시작 노트
양파를 수확하며 문득 생각했다. 줄기가 쓰러지고 마르는 동안에도 양파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제 속을 꽉 채운다. 농부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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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캐며
장마 오기 전
감자꽃이 진 밭에서
흙을 파 내면
하얀 감자, 자주감자.
아버지의 하얀 등허리
어머니의 자줏빛 어깨가
흙냄새처럼 퍼진다.
와,
너도 그 시절의 땀이다.
와,
너도 못다 건넌 끼니다.
한때는 밥이 되고
한때는 숨이 되던 시절이다.
손에 쥔 감자가
올해에 유난히 무겁다.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 시작 노트
장마가 오기 전 농사지은 감자를 캐면서, 유년 시절 농촌의 기억을 통해 부모님의 노동과 삶이 떠올랐다. 감자의 색을 부모님의 옷 색과 겹쳐 상징화하고, 흙 속에서 건져 올린 감자를 곧 지나간 시간과 가족의 생존으로 확장해 보려 했다.
유월에
하늬바람에 젖은 등을 말리며
농부가 대추꽃을 올려다본다.
노란 대추꽃들이 가볍게 흔들리고
산기슭 밤 숲에는
밤꽃 향기가 가득하다.
문득,
고라니 한 마리
고요를 밀치며
숲 저편으로 사라진다.
농부의 굽은 등이
산등성이를 닮아갈 무렵,
바람은 고개를 숙인 채
초목 사이를 지나간다.
나는 산속에서
초록과 눈을 맞춘다.
유월은
가장 푸른 곳에서
천천히 성장해 가고 있다.
*시작 노트
유월은 자연이 가장 왕성한 생명의 기운을 내 뿜는 계절이다. 산기슭의 농부와 꽃, 바람, 고라니가 어우러진 한순간의 풍경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닮아가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미역
물속에서
귀를 열었다.
바다 골짜기를 오가는
수많은 생명의 소리.
미역은 바위에 몸을 붙인 채
조류에 온몸을 몽땅 맡기고
오래 두 귀를 열고 살아왔다.
살다가 문득 소통에
버거운 날이 오면
나는
바다의 미역을 떠올린다.
고요하지 않은 곳에서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떠내려가지 않고
잘 살아가며 견뎌내는
저리도
놀라운 생명력의 미역을.
* 시작 노트
바다는 속은 늘 시끄럽다. 수많은 생명이 스치고, 물결은 쉼 없이 몸을 흔든다. 그 분주한 가운데서 미역은 바위에 붙어 조류를 견디고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힘으로 버티기보다 흔들림 속에서 제 자리를 지키는 미역의 생명력을 바라본다. 삶이 버거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떠내려가지 않으면서도 물의 흐름과 함께 살아가는 미역의 지혜를 떠올려 본다.
바람 한 점 없을 때
바람 한 점 없는 때는
나는 문득 두려움에 든다.
살아온 날들보다
견뎌온 바람이 늘 많았다.
몸은 흔들림에 익숙해졌고
마음은 소란에서 고요했다.
지금은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아
세상이 숨을 죽인듯하여
오금이 저린다.
바람이 멎은 자리에
적막은 더 깊어지고 있다.
평온이라는 청정심의 침묵은
때로 폭풍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안다.
흔들리며 살아온 내게
가장 낯선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 없을 때라는 것을.
*시작 노트
살아오며 수많은 바람을 맞았다. 흔들림과 불안, 상실과 기다림 속에서 삶은 늘 움직이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그 흔들림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문득 바람이 멎은 날, 오히려 낯선 두려움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는 때때로 폭풍보다 더 깊은 침묵과 마주하게 한다. 시련보다 평온이 더 낯설어진 내면의 무게를 담아내고 싶었다.
한정찬
□ (사)한국공무원문학협회 고문,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한정찬시전집 2권, 한정찬시선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