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리인가 고구려인가(上) ― 麗·驪·黎의 본음은 ‘리’다
‘우리 역사와 땅’을 발간하며 ‘역사와 언어’ 범주의 첫 글로
「한국인은 나라이름에 관심도 없나?!」를 올렸다.
그 글에서 ‘대한’이나 ‘대한민국’과 발음이 전혀 닮지 않은
영문 국호가 어째서 Korea인가를 물으며,
역사상의 나라이름이 ‘고려’가 아니라 ‘고리’임을 짧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간단히 다룰 주제가 아니어서 두 편에 걸쳐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말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동’과‘똥’이 전혀 다른 뜻이 되듯,
바른 생각은 바른 발음에서 출발한다.
더구나 국호는 국민과 국가의 상징이다.
발음 하나가 가벼운 문제일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상편에서는 우선 ‘우리 국호의 본음이 무엇이었는가’를
사서와 음운학으로 확정하고자 한다.
- 사서에 나타나는 국호의 여러 표기
지나인들이 방대한 분량으로 자랑하는 25사의 동이전을 펼치면,
우리 국호가 한 가지로 적혀 있지 않다.
櫜離(고리), 槀離(고리), 高麗(고리)가 있고,
그밖에 高句驪·高句麗가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후한서』다.
高句驪를 쓰면서도 句驪(구리)라는 국호를 12회나 함께 사용하였다.
별개의 나라처럼 보이지만 두 표기를 한 흐름 안에서 섞어 썼고,
왕망이 자존심을 세우려 한 대목에서는
下句驪(하구리)라고까지 적었다.
글의 맥락으로 보면 句驪는 단순히‘高’를 생략한 형태임을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삽화①〕 글 위의 그림
- 여러 사서가 전하는 이칭(異稱)
『후한서』 권85 부여국전은 동명전설을 전하며
“初北夷索離國王出行(그전에 북이 색리국 국왕이 출타한 동안에)”으로 시작한다.
그 주(注)에 “索或作橐 音度洛反”이라 하여,
‘索(색)’은 橐(탁)으로도 쓰며 그 음은 도(度)와 락(洛)의 반절, 곧 ‘닥’이라 하였다.
북방계 종족의 ‘텡그리’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면 단군의 또 다른 표현일 여지가 있다.
『삼국지』 권30 부여전은 현존하지 않는 『위략』을 인용하여
“昔北方有高離之國者(옛날 북방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라 하였으니,
高離(고리)가 국호였음을 일러 준다.
『양서』 권54 諸夷(제이: 여러 종류의 이) 가운데 고구리전은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동명은 본래 북이인 고리왕의 아들이다)”라 하여 櫜離를 썼다.
櫜(고)는‘활집’이라는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離(리)와 함께 뜻이 아니라 발음을 적는 수단일 뿐이다.
이들을 종합하면, 주몽의 아버지 나라는
‘북부여’라기보다 ‘고리’로 지칭되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高(고)는 藁·櫜로도 적었고, 櫜 대신 索·橐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같은 음 ‘고리’를 여러 글자로 옮긴 것이며,
高麗 역시 그 한 갈래다.
국호의 핵심은 일관되게 ‘리’이며, 글자는 그 음을 옮기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 麗·驪·黎의 발음은 ‘리’로 귀결된다
이는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지나(支那) 사서의 주석과
그들 자신의 고음가(古音價) 연구가 똑같이 일러 주는 사실이다.
『사기』 권6 진시황본기를 보자.
“秦置麗邑”에 정의(正義)는“麗,力知反”이라 하였고,
그 뒤에 “因徙三萬家麗邑”에는“麗音離”라 하였다.
권6 안에서 두 번씩이나 麗가‘리’임을 못 박은 것이다.
黎 또한 다르지 않다.
『사기』 권8 고조본기의 “黎明” 대목에 색은(索隱)은 “音犁”라 하여,
黎의 음이 ‘리’임을 분명히 적어 두었다.
정작 글자를 만든 우리에게는 말로만 남아있고,
글을 많이 남긴 그들의 주석이 ‘리’라 증언하는 것이다.
근대의 음운 연구도 마찬가지다.
중화서국이1999년 펴낸 『漢字古今音表』는 약9천 자의
상고음·중고음·근대음·현대음에 일곱 방언을
함께 정리한 뛰어난 언어학 서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麗·驪·黎는 시대마다
미세한 음가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결같이
‘리’이며, 현대음도‘리’다.
수천 년을 관통하여 확실하게 ‘려’로 흐른 적이 없다.

- 나라이름에 쓰인 麗는 ‘리’로 읽힌다
이 ‘리’라는 발음은 먼 옛날의 죽은 음이 아니다.
불과 백여 년 전 근대의 자전에도,
그리고 오늘날 나이 든 어른들의 입말에도 또렷이 살아 있다.
1796년 무렵 간행된 것으로 전하는 『전운옥편』은
麗를 “附著 東國高―”라 풀이하였다.
1952년 발행된 『명문신옥편』은 더 분명하다.
麗 항목 끝에 “國名 高句―, 高― 나라이름”이라 하여,
나라이름으로 쓰일 때의 풀이를 따로 두었다.
(다만 이 자전들이 일부 새김을 ‘여’·‘이’로 적은 것은
두음법칙을 지나치게 적용한 잘못으로, 이는 하편에서 따로 다룬다.)
〔삽화②〕 제목 앞의 그림
무엇보다 이 발음은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오늘도 연세 지긋한 어른들은 지난날을 떠올릴 때
“고릿적에 말이야”라며 자연스레 ‘고리’를 입에 올린다.
이 ‘고릿적’의 ‘고리’가 바로 고리(高麗)다.
고대 사서가 적고, 근대 자전이 받아 적고,
오늘의 입말이 무심코 이어 온 그 발음이 곧‘리’인 것이다.
고대–근대–현대를 한 줄로 꿰는 살아 있는 증거가 우리 곁에 있다.

그렇다면 이 ‘리’라는 발음은 대체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그리고 수천 년을 살아남은 본음이
어쩌다 ‘고려’로 굳어 버렸는가.
하편에서 그 뿌리와, 그 끊긴 사연을 밝히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