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원유의 5분의 1이 지나는 좁은 물길 하나가, 펜이 아니라 마우스 클릭으로 열릴지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동 전쟁을 끝낼 합의가 일요일에 서명된다고 선언하면서, 서명 직후 호르무즈 해협이 모두에게 열린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테헤란은 그 날짜를 확인해 주지 않았다. 합의의 윤곽은 잡혔는데 서명의 순간만은 안갯속이다. 한 장의 문서를 둘러싼 이 기묘한 줄다리기 안으로 들어가 본다.
왜, 어떻게 '잉크 없는 서명'이 등장했나
흥미로운 대목은 서명 방식이다. 애초 트럼프는 지난주만 해도 유럽에서 대면 서명식을 열고, 미국 측은 J.D. 밴스 부통령이 대표로 참석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해외에 머물 수 없다는 안보·통치 연속성 원칙이 발목을 잡았고, 트럼프가 월요일 프랑스 G7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로 하면서 일정이 빠듯해졌다. 밴스 부통령을 유럽 서명식에 제때 보내는 일이 물류 상 까다로워지자, 결국 '전자서명'이라는 묘안이 탁자 위에 올랐다. 협상에 정통한 인사들은 이 디지털 서명 구상이 최근 24시간 사이에 무르익었다고 전한다. 합의를 신속히 굳히고 막판에 튀어나올 변수를 차단하려는 계산이다. 중재자들은 문서가 서명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 판을 흔들거나 어느 한쪽이 발을 빼는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한다.
합의의 알맹이는 이렇다. 한 이란 고위 당국자가 국제 통신사에 전한 바에 따르면, 초안 양해각서에서 테헤란은 핵무기를 제조하지도, 보유하지도 않기로 했다. 그 대가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모든 상선에 즉시 다시 열고, 미국은 해상 봉쇄를 거둔다. 미국은 이란이 고농축 우라늄 비축분을 자국 영토 안에서 희석하는 방안에 동의했으며, 구체적 절차는 향후 60일 안에 논의될 예정이다.
서명이 이뤄지면 양측 사이에 60일짜리 새로운 협상 국면이 열린다는 것이 미국 측 설명이다. 트럼프는 동결 자금의 '주인이 바뀌는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고, 농축 우라늄은 "모든 것이 가라앉을 때" 이란이나 미국에서 폐기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일이 풀리지 않으면,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은 최종 대안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손을 내미는 동시에 주먹을 쥐어 보인 셈이다.
화려한 발표와 달리, 테헤란 거리의 공기는 차갑다. AFP에 따르면 한 이란 시민은 "곧 합의가 이뤄질 것 같지 않다.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며 불신을 드러냈다. 이란 파르스 통신은 토요일 북동부 마슈하드의 외무부 청사 앞에서 합의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고 전했다. 공식 반응도 결이 다르다. 이란 외무부 대변인 이스마일 바카이는 토요일 이른 시각 "내일은 아니다"라고 못 박으면서도, "앞으로 며칠 안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며 문을 열어 뒀다. 혁명수비대는 "양해각서는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같은 날 카타르 대표단이 최종 문안 작업을 돕기 위해 테헤란을 찾았고, 이 회동은 이란 타스님 통신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한편, 이스라엘군은 휴전에도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 지역을 공습해, 합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역내 긴장이 여전함을 드러냈다.
결국 이번 합의는 '내용의 타결'과 '서명의 순간'이 따로 노는 기묘한 풍경을 보여 준다. 트럼프는 일요일을 외치고, 테헤란은 "며칠 안"이라 받으며, 혁명수비대는 "아직"이라 답한다. 워싱턴과 테헤란이 제재 완화의 폭을 두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는 지금, 이 온도 차가 단지 국내 여론을 향한 수사인지, 아니면 합의를 무너뜨릴 균열의 신호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세계 경제의 동맥인 호르무즈가 클릭 한 번에 열리느냐 마느냐가, 지금 한 장의 전자문서 위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펜을 들 손은 준비됐는데, 정작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가 아직 흐릿하다. 우리는 과연 이번 주말, 평화의 서명을 보게 될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미뤄진 약속의 메아리를 듣게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