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뤘는데도, 왜 공허할까?” – 성취 후에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꿈을 이뤘는데 이상하게도 허전하다.”
많은 이들이 커리어의 정점에 올랐을 때, 목표로 삼았던 성취를 이루었을 때, 혹은 사회적 기준에서 ‘성공’이라 불리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이런 말을 내뱉는다. 어쩌면 우리가 꿈꿨던 성공은 언제나 ‘도달해야 할 무언가’였지, 그 이후를 설계하지 못한 채 달려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어떤 시험에 합격했고, 대기업에 입사했고, 창업에 성공했거나, 누군가가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올라섰다면 오히려 그 순간 찾아오는 정체성의 질문은 더욱 깊고 날카롭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혹은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감정의 심연을 휘감기 시작한다. 성취는 축하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공허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감정은 단순히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성취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외부 목표에만 맞추었을 때, 그 목표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이 자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성공한 나’와 ‘진짜 나’ 사이에 괴리가 생기면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본질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2. 정체성의 혼란, 현대인의 새로운 정서적 역병
성취 후 찾아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정서적 전염병에 가깝다. 경쟁을 미덕으로 삼고, ‘더 나은 나’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온 길 끝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 현상은 심리학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람은 사회적 성공을 통해 자아를 잃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심리학자 **제임스 마샤(James Marcia)**는 인간 정체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면서, 성취 이후의 정체성 혼란 상태를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라 명명했다. 이는 ‘무엇을 선택할지 미정’인 상태, 흔히 말하는 ‘혼란기’다.
우리는 대학을 정할 때, 전공을 선택할 때, 직업을 정할 때조차 주변의 기준이나 효율적 선택에 따라 결정을 내리기 쉽다. 정작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게 누적된 선택의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정체성의 벽에 부딪힌다.
3. 성과 중심 사회가 만든 ‘목표 뒤의 공백’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목표를 제시한다. 입시, 취업, 승진, 결혼, 육아. 모든 것이 ‘이뤄야 할 것들’이다. 이런 목표는 일시적으로 삶의 방향성을 부여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 단계가 없을 때’ 생기는 공백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없다. 이 공백은 무서운 침묵으로 다가온다. 누구도 그 이후를 말해주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의 번아웃’이나 ‘중년의 위기’는 모두 이런 시스템 속에서 비롯된 결과다. 우리는 일, 성과, 관계에서 ‘자기 가치’를 외부적 조건에 기대어 측정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런 외부 기준은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살아온 누군가는 은퇴 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가정에 헌신한 누군가는 자녀 독립 후 자기 존재를 잃는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동적으로 재구성된다. 문제는 우리는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혼란, 우울, 무기력이 스며든다.
4.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정체성을 다시 짓는 방법들
그렇다면 정체성을 어떻게 다시 정의할 수 있을까? 첫걸음은 ‘성과’가 아닌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룬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삶의 방향을 외부로부터가 아닌 내면의 동기에서 찾아야 한다.
둘째는 ‘관계’에서 나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친구, 멘토, 후배, 혹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다.
셋째는 ‘의미 있는 반복’이다. 글쓰기, 독서, 명상, 운동, 봉사처럼 반복되는 활동은 내면을 단단하게 하고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는 것은 정체성 회복의 강력한 도구다. 일기를 쓰거나, SNS를 활용한 자기표현을 통해 감정과 생각을 객관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선택하고 응답하는 일이다.

맺음말: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모든 시간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생을 통틀어 반복되는 질문이다. 그 해답은 특정한 자리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조금씩 축적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하고, 그 안에서 다시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일은 불안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성공 이후 찾아오는 공허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신호다. 그 신호를 부정하지 말고,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우리는 진짜 ‘나’를 향한 길 위에 서게 된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모든 시간이다."
당신이 오늘 내린 작은 결정들이 모여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든다. 이제, 다시 묻자.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