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긍휼 앞에서 무너진 양심
- - 에스라 9장의 절규가 말하는 오늘의 신앙 배신
에스라 9장 9–15절은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맞닥뜨린 내부 균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본문이다. 이미 무너졌던 신앙을 다시 세울 기회를 얻었음에도, 이스라엘은 회복의 기간에 오히려 더 깊은 타협으로 기울어졌다. 성전 재건이라는 역사적 회복을 이루었으나, 그 중심인 마음의 성전은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에스라가 옷을 찢고 땅에 엎드린 장면은 단순한 경건의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시대적 경고였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배신의 길을 택했는가?”라는 질문은 지금의 신앙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포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패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었다. 성전은 다시 세워졌고, 왕과 관리들은 그들에게 적절한 보호와 자원을 제공했다. 에스라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할 만큼 긍휼을 베풀었다. 그러나 문제는 회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무뎌졌다는 점이다. 우상 숭배의 위험을 안고 있는 주변 민족과의 혼합 결혼이 늘어나면서 공동체는 영적 경계를 잃었다. 겉으로는 회복의 시대였지만, 내면에서는 이미 균열이 퍼지고 있었다. 신앙의 무너짐은 언제나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익숙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에스라의 기도는 단순한 고백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신앙 상태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백성의 타락을 대신 고백하며 자신을 낮추었고, 죄의 뿌리를 직시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 너무 크기에 그 긍휼을 저버린 죄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는 논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오늘의 종교적 담론과 대조된다. 그는 “이런 일을 하고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주 앞에 서겠는가”라고 말하며, 죄가 공동체를 어디까지 허물어뜨릴 수 있는지 분명히 인식했다. 지도자의 통찰과 자기 낮춤은 신앙의 방향을 되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남는다.
에스라가 가장 깊이 슬퍼한 지점은 ‘은혜를 배신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 중 절망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회복되는 역사를 보았다. 하지만 그 은혜의 기억이 사라지자 공동체는 과거의 죄악을 반복했다. 신앙의 배신은 큰 사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시작된다. 익숙함은 위험하고, 은혜가 당연해지는 순간 마음은 서서히 이전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에스라의 슬픔은 바로 이 무서운 영적 퇴행을 향한 경고였다. 은혜를 잊는 사람은 다시 무너지는 길을 걷고,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회복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공동체는 뒤늦게 깨달았다.
오늘의 신앙 공동체 역시 회복과 타협 사이에서 길을 잃기 쉽다. 종교적 활동이 풍성해지고 제도적 기반이 갖춰질수록, 초심은 잊히고 경계는 흐려진다. 에스라의 질문은 교회와 개인을 향해 다시 제기된다. “긍휼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긍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긍휼을 감당하는 자세가 흐려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지금의 현실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에스라의 기도는 죄의 자리를 드러내는 고백을 넘어, 공동체가 다시 서기 위한 정신적 기반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 오늘의 독자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긍휼이 주어졌다면, 그 다음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에스라 9장 9–15절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회복 이후의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세웠고, 성전을 회복했으며, 공동체에게 “일어설 수 있는 울타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울타리 밖으로 걸어가 다시 혼합과 타협의 길로 향했다. 에스라의 기도는 정죄가 아니라 긍휼로 돌아오라는 초대다.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만이 다시 설 수 있고, 공동체는 그 기억 위에서야 비로소 회복을 이어간다. 오늘의 독자 역시 이 질문 앞에 설 수 있다. “긍휼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 서 있는가?” 그 물음은 과거의 백성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