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은 했지만, 여전히 매일 출근합니다.” 올해 68세의 박정수 씨(가명)는 서울 성북구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에서 마케팅 자문으로 일하고 있다.
30년 넘게 대기업 영업팀에서 근무했던 그는 퇴직 후 3년간의 ‘쉼’을 가진 뒤, 2024년 다시 사회로 복귀했다. 그는 “처음에는 생활비를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는 일이 제2의 젊음을 주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퇴직’은 더 이상 ‘은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년을 맞아 회사를 떠나더라도, 노동 시장 안팎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노년층이 빠르게 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다. 이들 중 절반 가까이는 “정년 이후에도 계속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 정년의 의미가 바뀌다… 일하고 싶은 노년의 등장
예전에는 ‘정년퇴직’이 인생의 마침표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또 다른 출발점이 되고 있다. 60세 이후에도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시니어들은 일을 통해 사회와의 연결감을 유지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서울 송파구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이순자 씨(65)는 30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정년퇴직 후 창업했다.
그는 “퇴직 후 집에만 있으니 오히려 더 우울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던 삶에서 갑자기 멈추니 허전했다”며 “커피를 배우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내게는 새로운 교단이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의 의미’는 생계유지에서 ‘삶의 동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 노동시장 구조의 변화…재진입을 택한 세대
기업들도 변화에 나섰다. 과거에는 정년이 곧 퇴직의 시점이었지만, 지금은 ‘재고용’이나 ‘전문자문계약’ 형태로 베테랑 인력을 다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대기업은 60세 정년 이후에도 2년 단위 계약으로 일할 수 있는 ‘시니어 어드바이저’ 제도를 운영한다. 또한 정부도 고령층의 노동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시니어 인턴제, 중장년 기술 재교육 프로그램 등을 강화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60세 이상 취업자 수는 2020년 457만 명에서 2024년 520만 명으로 급증했다. 특히 서비스업, 돌봄, 기술컨설팅, 스타트업 분야에서 시니어 인력의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고령층이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복귀하면서, ‘은퇴 없는 사회’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 세대 공존의 현장… 경험과 혁신의 만남
문제는 세대 간 인식 차이다. 일부 청년층은 “시니어 세대가 일자리를 점유한다”고 불만을 제기하지만, 현장에서는 오히려 서로의 경험이 시너지를 내는 경우가 많다.
한 IT 스타트업에서는 20대 기획자와 60대 전직 엔지니어가 한 팀으로 일한다. 젊은 세대의 빠른 트렌드 감각과 시니어의 경험이 결합돼, 프로젝트 완성도와 안정성이 함께 높아졌다고 한다.
회사 관계자는 “처음엔 세대 차이로 걱정이 많았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배운다”며 “이제는 연령보다 실력이 중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하는 노년’은 단순히 생계형 노동자가 아니라, 세대 간 협력의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사회가 이들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할 때, 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닌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될 수 있다.
■ 은퇴 대신 ‘두 번째 커리어’를 선택한 세대
노년층의 일자리 재진입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 서비스직에 한정되었지만, 이제는 전문지식, 기술, 경험을 살린 ‘두 번째 커리어’로 발전하고 있다. 퇴직 교사가 상담사로, 전직 회계사가 창업 멘토로, 전문직 퇴직자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등 그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한 인사전문가는 “정년 이후에도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다”며 “노년층의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아 실현의 통로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일하는 노년’이 바꾸는 한국의 미래
퇴직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다음 장을 여는 문이다. 노년층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사회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한국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문화가 싹트고 있다. ‘은퇴 없는 사회’는 더 오래 일하는 사회가 아니라, ‘일을 통해 더 오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뜻한다. 퇴직은 있어도 은퇴는 없다. 이제 한국의 노년은 ‘일’로 삶을 이어가며,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사회를 바꾸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