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점의 정물화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종종 ‘익숙함’을 느낀다. 꽃병, 과일, 테이블—그 구성은 일상의 일부이고, 누구나 본 적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작품 〈사과가 있는 정물〉은 그 익숙함 속에서 묘한 낯섦을 만들어낸다.
그림 속에는 사과가 있다. 제목이 말하듯, 그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단순한 존재가 전하는 울림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화가는 정물의 배치를 통해 감정이나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 시간의 층이 차곡차곡 쌓인 화면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화면 전체를 감싸는 미세한 긴장감이, 오히려 ‘정적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사과는 막 따온 듯 싱그럽지도, 썩어가는 극적인 순간에도 있지 않다. 그저 중간 어딘가, ‘지나가고 있는 시간’ 위에 놓여 있다. 꽃 또한 만개한 화려함 대신 막 피어나거나 지기 시작하는 흰 꽃들이다. 이 미묘한 시점은 화려함과 쇠락 사이, 즉 생과 사의 경계를 은근히 드러낸다. 예술사적으로 정물화는 종종 죽음이나 덧없음을 상징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상징보다 현존하는 사물의 시간성에 더 집중한다. ‘살아온 흔적’이 남은 사과의 표면, 거칠고 불균질한 붓질은 삶의 단면처럼 느껴진다. 그 위에서 관람자는 ‘지나가는 시간’을 시각적으로 경험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투명한 유리 화병이 놓여 있다. 그 안에 꽂힌 꽃과 테이블 위의 사과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듯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빛의 부재다. 특정한 방향에서 강하게 쏟아지는 조명이 아니라, 전체를 고르게 덮는 부드러운 빛이 화면을 감싼다. 덕분에 어느 하나가 ‘주인공’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같은 시간,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듯하다. 이 균형감은 정물화의 본질적 속성—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화면의 배경은 녹색과 황토색이 겹겹이 쌓인 질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흘러내린 듯한 선, 갈라진 표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남긴 흔적, 혹은 공간의 기억이다. 화병의 투명함과 대비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물’ 속에서도 흐르는 생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사과가 있는 정물〉은 결코 ‘갤러리 안에만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이 그림은 식탁 옆이나 서재처럼 일상이 흘러가는 공간에 놓였을 때 진가를 드러낸다.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이 바뀔 때마다 사과의 색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도 조금씩 변한다.
이 작품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대신 매일 조금씩 다르다. 그 변화는 화가가 의도한 ‘시간의 호흡’이기도 하다. 그림 속 사물들은 멈춰 있지만, 보는 사람의 시선과 함께 끊임없이 살아 움직인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주는 조용한 울림이다. 결국 이 그림이 말하는 것은 ‘존재의 안정감’이다. 매번 새롭지는 않지만, 늘 거기 있는 존재. 삶 속에서 그런 존재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깊은 위로를 준다.
사과가 있는 정물’은 일상의 장면을 통해 시간과 존재를 이야기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색으로 남아 있나요?” 멈춰 있는 듯한 정물 속에서, 우리는 흘러가는 자신의 시간을 본다. 그래서 이 그림은 오래 곁에 둘수록 더 깊어지는 작품이다. 아무 일 없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