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류큐는 조선과도 의미 있는 외교와 교역 관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류큐가 스스로를 ‘만국진량(萬國津梁)’이라 규정한 비전에는 조선 역시 중요한 구성 요소로 포함되어 있었다.
류큐와 한반도 국가의 공식 교류는 1389년, 고려 공양왕 원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중산왕 찰도(察度)는 왜구에게 붙잡혀 있던 고려인들을 구출해 본국으로 송환했고, 이를 계기로 사절 완옥지(完玉之)를 고려에 파견했다. 고려 조정은 이에 화답해 김윤후(金允厚) 등을 사신으로 보내며 외교 관계를 열었다.
조선 왕조 성립 이후에도 이 같은 교류는 이어졌다. 류큐는 동중국해를 오가던 과정에서 구조한 조선 표류민을 적극적으로 송환하며 인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류큐를 신뢰할 수 있는 해상 파트너로 인식하게 되었고, 외교적 교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류큐와 조선의 교역은 직접적인 공식무역과 비공식적인 교역이 병행되는 형태였다. 류큐 사절단은 규슈 서안과 쓰시마(對馬)를 경유해 부산에 도착하는 북방 항로를 주로 이용했다.
류큐가 조선에 공급한 주요 품목은 동남아시아에서 확보한 소목(蘇木),후추,상아와 같은 열대 산물이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여온 비단과 도자기도 함께 유통되었다. 반대로 조선은 면포(綿布)와 인삼을 류큐에 제공했다. 특히 조선 면포는 류큐 내부 소비뿐 아니라 다른 지역과의 중계 무역에서도 화폐 대용물로 활용될 만큼 가치가 높았다.
1458년 주조된 만국진량의 종(萬國津梁之鐘) 명문에 ‘조선의 우수함을 모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류큐가 조선의 물산과 문화를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기록이다.
류큐와 조선의 관계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 종교와 학문으로 확장되었다. 류큐 왕실은 불교를 국가적 신앙으로 중시했으며, 조선에 여러 차례 불교 경전과 대장경을 요청했다.
1455년 쇼태구왕(尚泰久王)은 사절 도안(道安)을 조선에 보내 대장경을 청했고, 이후 조선 왕실은 대장경과 불교 서적을 기증했다. 이 경전들은 슈리 인근의 원각사(圓覺寺) 등에 봉안되며 왕실 불교 의례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조선과의 외교 과정에서 동물,공예품,문헌이 상호 교환되며 문화적 유대가 형성되었다.
조선과 류큐 사이의 빈번한 항해는 수많은 표류 사건을 낳았고, 이들이 남긴 기록은 류큐 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5세기 중반 류큐에 표착한 정록(丁禄),양성(梁成),소득성(肖得誠) 등의 기록에는 당시 류큐의 정치 체제와 풍속이 상세히 담겨 있다.
1477년 제주도 주민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요나구니섬에 표류했다가 귀환한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류큐의 언어,의례,지리 인식을 전하는 드문 외부 시선의 자료로 평가된다.
15세기 후반 이후 류큐와 조선의 교류는 점차 위축되었다. 일본 상인들이 류큐 사절을 사칭하는 사건이 잦아지며 조선 조정이 외교적 경계를 강화했고, 해상 치안 악화 역시 직접 교역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 형성된 조선과의 교류는 류큐가 단순한 중계 무역국을 넘어, 동아시아 해상 질서의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면직물 활용,불교 수용,외교 의례의 정교화는 이후 류큐 문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류큐와 조선의 교류는 규모 면에서는 제한적이었으나,외교적 신뢰와 문화적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지속되었다. 이 관계는 류큐 왕국이 구축한 만국진량의 비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닌,실제 작동한 해상 질서였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