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9문
Q. 19. What is the misery of that estate whereinto man fell? A. All mankind by their fall lost communion with God, are under his wrath and curse, and so made liable to all miseries in this life, to death itself, and to the pains of hell for ever.
문 19.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겪는 비참함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인류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그분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모든 비참함을 겪고, 죽음을 맞이하며, 영원히 지옥의 고통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프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인간의 실존을 정의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가장 아픈 단어는 아마 '소외'일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말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이야기한 '던져짐(Geworfenheit)'은 그들이 포착한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9문은 이 인문학적 소외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선언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이다. 뿌리 뽑힌 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어도 이미 죽어가는 중이듯, 창조주라는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그 순간부터 '비참'이라는 이름의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라틴어로 비참을 뜻하는 '미세리아(Miseria)'는 단순히 슬픈 감정이 아니라, 사방이 꽉 막힌 궁지에서 벗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형편을 의미한다.
이 비참의 첫 번째 증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신의 진노(ὀργή, 오르게)'는 감정적인 분노로 오해받기 쉽지만, 이는 거룩한 질서가 무너진 것에 대한 공의로운 반응이자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것과 같은 필연적인 작용이다.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을 때 겪는 추락의 고통이 중력의 보복이듯, 신의 저주는 인간이 생명의 법을 어겼을 때 마주하게 되는 우주적 질서의 결과물이다. 이는 '근원적 수치심'으로 나타난다. 아담이 범죄 후 나무 뒤로 숨었던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결함을 들킬까 봐 끊임없이 무언가로 자신을 치장하고 은폐하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면의 공허와 신의 심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는 깊어만 간다.
비참함은 관념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한다. 소요리문답은 이를 '이 세상에서의 모든 비참함'이라고 표현한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 삶이다. 노동은 더 이상 즐거운 창조 행위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이 되었고, 자연은 인간에게 우호적인 안식처가 아닌 저항하는 환경으로 변했다. 질병, 가난, 갈등,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모두 이 타락의 유산이다. 끊임없는 리스크와 경쟁의 압박, 현대인이 호소하는 번아웃과 우울증은 사실 우리가 낙원에서 쫓겨난 망명객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통증 신호들이다. 소유가 늘어나도 존재가 빈곤한 이유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근원적 결핍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참의 정점에는 '죽음(Θάνατος, 타나토스)'이 있다. 죽음은 생물학적 종결을 넘어선 인격적 파멸의 선고다. 존재의 지속을 갈망하도록 지어진 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사건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지만, 성경적 섭리의 관점에서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죄의 삯'으로서의 형벌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모든 성취와 명예는 무력해지며, 인간은 자신이 영원하지 않은 피조물임을 뼈저리게 확인한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요리문답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언급한다. 이는 단순히 뜨거운 불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그리고 확정적으로 단절된 상태에서 겪는 '궁극적 고립'이다. 지옥은 신의 사랑을 거부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이기심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닫힌 자아'의 감옥과 같다.

그렇다면 이토록 처절한 비참의 목록을 우리는 왜 마주해야 하는가? 인문학은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인간의 한계를 통찰하게 한다. 신학은 이 비참의 진단을 통해 우리를 '겸손'과 '갈망'의 자리로 이끈다. 우리가 처한 상태가 '완전한 파산'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죄와 비참의 심연이 깊을수록, 그 심연을 덮기 위해 내려오는 은혜의 깊이 또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섭리는 우리를 이 고통 속에 방치하기 위해 비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어디인지를 일깨우기 위해 이 어두운 지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고통을 '운이 없어서' 혹은 '사회의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우연한 사고로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요리문답은 고통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뿌리 뽑힘'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지옥의 형벌을 언급하는 것은 공포 마케팅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치가 그만큼 영원하고 중대하다는 역설적인 강조다. 우리의 비참함이 깊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그만큼 영광스러운 존재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비참의 자각은 우리를 절망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안아줄 유일한 팔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제19문은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과 고통에 대한 근원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허무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존재론적 향수병이다. 죽음의 위협과 삶의 고통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협박이 아니라,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오라는 창조주의 거룩한 초청장이다.
비참함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자만이 그 비참을 종결시키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의 필연성을 깨닫는다. 타락한 인류의 성적표는 0점이지만, 그 낙제점을 대신 짊어지신 분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이 비참한 망명 생활 속에서도 다시금 '본향'을 향한 소망의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