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돌처럼 단단한 예혼으로 일궈낸 소통과 보시(布施)의 세계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논어(論語) 학이편(學if)에 나오는 이 한 구절은 평생 한 자루의 붓으로 세상과 조우해 온 완석 정대병 서예가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속도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지독하리만치 올곧게 서실을 지킨다. 창작자들이 흔히 말하는 슬럼프라는 단어조차 사치라 말하며, 오직 묵향 속에 머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라 고백하는 정대병 서예가. 지리산의 단단한 돌처럼 다져진 그의 서예 인생과 세상만사를 포용하는 융화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서예는 혼자만의 고독한 예술이 아니다. 나의 글씨가 섬진강 물길처럼 번져나가 사람과 사람,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융화되는 세상을 꿈꾼다”
◇섬진강 물길을 닮은 예술, 고독에서 소통으로
완석 정대병 서예가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사방을 메운 대작들의 기운과 묵직한 먹향이 온몸을 감싼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수려한 자연을 품은 하동에서 수십 년간 고유의 서풍을 일궈온 그는, 자신의 글씨가 자연의 순리를 닮아가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을 걸은 이후 지금까지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한길을 걸어왔지만, 그에게 서예는 여전히 첫날의 떨림이자 매일 풀어내야 하는 신비로운 숙제다.
많은 이들이 서예를 외롭고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라 말하지만, 정대병 서예가에게 붓을 드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통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실로 향했음에도 그의 발걸음이 늘 가벼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가라면 으레 겪는 슬럼프조차 그를 비껴간 것은, 붓을 쥐고 좋은 이들과 서예를 이야기하는 일상 자체가 이미 삶의 온전한 행복이자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씨는 하동 섬진강의 물길을 닮았다. 모래가 물을 품고 물이 다시 모래를 쓰다듬으며 끝없이 흘러가듯, 그의 필치 역시 어느 한 곳 모나지 않게 세상 만물과 조화롭게 융화된다. 매일 아침 먹을 갈며 붓을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은 결국 '비움'으로 향한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마음속에 쌓인 독기와 욕심을 덜어내고, 그 빈자리에 타인과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채워 넣는 것. 그것이 바로 거장이 묵향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뼈대를 세우고 자유를 쓰다, 당대(唐代) 한시와 초서(草書)의 세계
정대병 서예가는 전서, 예서, 행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는 역사 속 명현들이 남긴 문장과 한시를 소재로 깊이 있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당나라 시절의 시가를 최고로 꼽으며, 옛 성현들의 정신을 온전히 내면화하는 임서(臨書) 과정에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최근에는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움직임을 담아낼 수 있는 '초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대중과 직관적으로 소통하는 비결은, 법도와 개성의 절묘한 균형에 있다. 그에게 전통의 법도를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일은 박제된 유물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며, 반대로 기본 뼈대 없이 개성만 내세우는 것 또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수천 년간 내려온 명문을 끊임없이 쓰고 또 쓰는 ‘임서’에 매진해 왔다. 고전의 기초와 그 시대의 호흡을 몸에 문신처럼 깊이 새긴 후에야, 비로소 작가 고유의 감성과 시대의 흐름이 담긴 개성이 붓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규격화된 틀을 깨고 획의 굵기와 속도, 공간의 미학을 극대화할 수 있는 ‘초서’는 그가 현대인들과 교감하는 가장 자유로운 통로다. 그는 한문을 전혀 모르는 젊은 세대라 할지라도 글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며 질문을 품고 호기심을 느낀다면 서예가로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박물관에 갇힌 죽은 글씨가 아니라, 현대인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에너지를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서예를 통해 대중과 마주하는 방식이다.
◇문수선원 반야심경 대작, 기증을 통해 실천하는 보시(布施)
그의 예술 철학은 서실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세상 밖으로 아낌없이 흘러넘친다. 정 서예가는 남해 문수선원에 200호에 달하는 대작 ‘반야심경’을 전서체로 완성하여 기증한 것을 비롯해, 경남도청, 산청 선비문화연구원 등 수많은 공공 전당과 문화 공간에 자신의 혼이 담긴 대작들을 조건 없이 내놓았다. 예술품이 자산이나 사치품으로 전락하는 시대에, 그의 이 같은 행보는 신선한 귀감이 된다.
그가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피땀 흘려 완성한 대작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공공에 기증하는 이유는 작품의 진정한 생명력이 ‘소유’가 아닌 ‘나눔’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 서예가는 “서실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갇혀 있는 순간, 작품은 이미 생명을 잃은 조각에 불과하다”며, “글씨는 사람들이 바라봐 주고,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나 인생의 해답을 얻어갈 때 비로소 살아 숨 쉬게 된다”고 굳은 신념을 밝혔다. 실제로 불교 경전이나 명심보감의 구절을 쓸 때마다 늘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추스르며 글을 써 내려간다. 자신의 필력과 시간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를 받고 삶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작품은 이미 개인의 손을 떠나 대중의 것이 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예술가가 소유욕을 내려놓고 아낌없이 베풀 때, 영혼은 비로소 맑아진다. 글씨를 팔아 얻는 물질적인 가치보다, 내 붓끝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고 세상에 선한 기운으로 가닿는 정신적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크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진짜 이유다”
◇묵향의 미학, 속도의 시대에 던지는 느림의 위로
컴퓨터 서체와 인공지능이 글씨를 순식간에 찍어내는 이 시대에, 완석 서예가는 붓글씨가 가진 아날로그적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먹을 갈고 화선지를 펴는 그 ‘느림의 시간’ 자체가 현대인들의 파편화된 마음을 치유하는 최고의 수행이라는 뜻이다.
그는 디지털 세대에게 서예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 ‘정직함’과 ‘내면의 치유’를 꼽는다. 컴퓨터 서체와 달리 서예는 붓을 쥐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숨소리, 심지어 그날의 기분까지 화선지 위에 숨김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가장 정직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의 삶을 안타까워한다. 그 번잡한 마음을 다스릴 묘책이 바로 붓끝에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 획을 긋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힘을 조절하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테크닉을 배워 글씨를 잘 쓰는 기술자가 되기보다, 묵향을 맡으며 올바른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서 서예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자 힘이다”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먹을 갈고 화선지를 펴는 그 느림의 시간 속에서, 현대인들은 파편화된 마음을 달래고 올바른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법을 배운다. 결국 그에게 서예란 디지털 시대의 속도전을 이겨내고 인간성을 회복하게 만드는 가장 고요하고도 강력한 수행인 셈이다.
◇지리산 돌처럼 굳건하게 걸어갈 길
지리산의 단단하고 묵묵한 돌을 뜻하는 그의 호 ‘완석(頑石)’처럼,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묵향의 길을 걷는 동시에 후학 양성에도 온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그는 사)한국서예협회 경남지회장 등 서단(書壇)의 굵직한 소임들을 역임하며 지역 문화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세간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권위주의를 가장 먼저 내려놓은 그는, 서실의 문을 활짝 열고 지역 주민이나 동료 서예인들과 격의 없이 차를 나누며 소통하는 것에서 삶의 가장 큰 낙을 찾는다. 그의 예술이 서실이라는 닫힌 공간을 넘어 지역 공동체의 따뜻한 사랑방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거나 서두르는 법 없이, 오직 자신만의 올곧은 궤적을 묵묵히 채워 나가는 완석 정대병 서예가. 전통의 필법 위에 세상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는 거장이기에, 화선지 위를 수놓을 그의 다음 붓끝이 벌써부터 깊은 기대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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