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일을 훌쩍 넘긴 전쟁의 한복판에서, 한 장의 문서가 조용히 새어 나왔다. 미국과 이란이 물밑에서 다듬어 왔다는 '14개 항 합의 초안'이다. 빗장을 풀고, 함대를 거두고, 얼어붙은 돈을 녹인다는 약속이 줄지어 담겼다. 포성에 지친 세계가 숨을 죽이고 이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것은 아직 '서명된 평화'가 아니라 '주장된 초안'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문서는 전쟁의 마침표가 될 것인가.
2월 28일 시작된 전쟁은 공습과 봉쇄, 호르무즈해협의 빗장과 경제의 붕괴를 차례로 불러왔다. 파키스탄 등의 중재로 이어지던 협상은 교착과 재개를 반복했다. 그러던 6월 12일, 이란 반관영 메흐르 통신이 협상팀에 가까운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합의 초안의 세부를 터뜨렸다. 튀르키예 매체 CNN 튀르크가 아나돌루 통신(AA)을 받아 전했고, CNBC와 Ynet 등 외신도 잇따라 보도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초안이 곧바로 평화협정이 아니라, 본협상에 앞서 충족해야 할 '전제조건의 지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뢰가 바닥난 두 적국이 서로에게 먼저 행동으로 증명하라 요구하는 셈이다.
초안의 골격은 '주고받기'다. 우선 협상의 범위가 핵과 경제로 좁혀졌다. 이란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역내 '저항 세력'에 대한 지원은 의제에서 완전히 빠졌다. 이란으로서는 양보하기 힘든 두 카드를 협상 테이블 밖으로 빼낸 것이다. 미국이 짊어질 약속은 묵직하다. 석유·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재의 해제, 이란 주변 미군의 철수, 해상봉쇄의 종료, 호르무즈의 개방, 그리고 동결된 자금의 반환이다. 여기에 미국과 동맹이 최소 3천억 달러 규모의 이란 재건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항목까지 담긴 것으로 외신들은 전한다.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 즉시·항구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이란의 주권과 내정 불간섭을 존중한다는 조항도 들어 있다.
시간표는 촘촘하다. 첫 30일 안에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고, 호르무즈는 테헤란의 규정에 따라 선박 통항에 완전히 열린다. 석유와 그 파생품에 대한 제재도 유예된다. 이어 두 달간의 협상이 핵 활동과 제재 해제, 농축우라늄의 처리, 경제 개발을 두고 진행된다. 그러나 이란은 굵은 '빨간 선'을 그어 두었다. 동결 자금의 절반이 풀리고, 석유 제재가 유예되며, 봉쇄가 해제되기 전에는 최종 협상을 결코 시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돈의 액수도 구체적이다. 240억 달러의 동결 자금이 협상 기간에 풀리되, 그 절반인 120억 달러는 공식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란 손에 들어가야 한다. 이행을 감시할 기구를 두고, 최종 합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못 박는다는 조항도 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미국은 이 세부 내용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이란 국영방송은 초안의 존재 자체는 인정했으나, 트럼프가 합의가 사실상 승인됐다고 한 발언은 부인했다. 블룸버그는 이르면 일요일 스위스에서 서명이 이뤄질 수 있다고 전했는데, 이는 6월 15일부터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무렵이다.
잉크는 폭탄보다 가볍지만, 그 가벼운 한 줄이 무거운 포화를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초안은 아직 평화가 아니다. 서로에게 먼저 증명하라 요구하는 전제조건의 벽 앞에서, 수많은 합의가 끝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스러져 갔다. 그럼에도 전쟁에 지친 사람들은 이 한 장의 종이를 한 줄기 빛으로 읽을 것이다. 무너진 시장과 끊긴 식수, 멈춰 선 배들 위로 드리운 그 빛이 부디 신기루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합의의 진짜 무게는 문서에 적힌 14개의 항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낼 두 나라의 의지에 달려 있다. 종이 위의 약속이 마침내 사람들의 평범한 내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인가. 세계는 지금, 그 답을 숨죽여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