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람권에서 살면서 무슬림들의 삶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들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기둥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정명(定命)' 사상, 즉 모든 운명은 이미 알라에 의해 정해졌다는 믿음이다.
이 깊은 신앙은 그들의 일상 언어 속에 '인샬라(Inshallah)'라는 한마디로 응축되어 나타난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 신학에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야기하는 '예정론'이 존재한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는 이 두 개념은, 그러나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삶과 책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며, 각기 다른 삶의 태도를 낳는다.
기독교 예정론: 주권적 계획 속의 능동적 책임
기독교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 어떤 사람들을 구원으로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을 심판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교리를 의미한다.
이는 주로 칼뱅주의에서 강조되며,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반응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사상을 말한다. 기독교의 예정론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깊은 신학적 고찰을 통해 정립되었다. 이는 단순히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 계획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사도 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에베소서 1:4)라고 선포한 것처럼, 예정론의 핵심은 구원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두 기둥 위에 세웠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상태이며, 오직 하나님의 선제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자격이나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선물이다.
이러한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자 장 칼뱅을 통해 체계화되었다. 칼뱅에게 예정론은 성도에게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교리였다. 만약, 구원이 인간의 불안정한 노력이나 선택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평생 불안에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계획에 근거한다면,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취소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예정론이 인간을 운명에 갇힌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믿기에, 성도는 감사함 속에서 자신의 삶에 주어진 책임을 더욱 능동적으로 감당해 나간다.
이를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훌륭한 감독이 승리를 확신하는 전략을 모두 세워두었다고 해서 선수들이 경기를 뛰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유사하다. 선수들은 감독의 계획을 신뢰하기에 더욱 확신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로마서 8:28)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사랑하고, 일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오묘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간다.
이슬람의 정명(定命)과 '인샬라': 순응의 미학
반면, 이슬람의 '정명' 사상은 무슬림의 여섯 가지 핵심 믿음(6신) 중 하나로, 세상의 모든 길흉화복과 인간의 선악까지도 알라가 미리 정해놓았다는 믿음이다. 꾸란은 "보이지 않는 것의 열쇠들이 알라께 있나니... 대지의 어둠 속에 있는 곡식 한 알도... 그분께서 모르시는 것이 없으니"(꾸란 6:59)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운명론적 세계관은 '인샬라'라는 표현으로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인샬라'는 문자적으로 '알라께서 원하신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는 꾸란의 "내가 내일 그것을 하리라 말하지 말라. 단, 알라의 뜻이라 하되"(꾸란 18:23-24)라는 가르침에 뿌리를 둔 매우 신앙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 속 '인샬라'는 훨씬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아 "내일은 날이 갤 거야, 인샬라"라고 말하기도 하고, 친구의 어려운 부탁에 대한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무슬림 사회에서 '인샬라'는 때로 책임 회피의 언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갚아야 할 빚을 독촉받을 때, "꼭 갚겠다"는 약속 대신 돌아오는 "인샬라"라는 대답은 '알라께서 내게 돈을 주셔야 갚을 수 있다'는 체념적 태도의 표현일 수 있다. 중요한 약속을 정하면서 듣는 "인샬라"는 그 약속이 지켜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모호함을 남긴다. 모든 결과의 책임이 알라에게 귀속되기에, 인간은 그 운명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같은 출발, 판이한 도착점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인샬라'와 기독교의 '예정론'은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신의 뜻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지만, 그 도착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슬람의 정명 사상은 인간을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놓인 순응적 존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알라는 인간의 인격적 교제보다는 절대적 복종에 관심을 두는 제왕으로 그려지며, 그 앞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개척 의지는 위축되기 쉽다. '인샬라'라는 편리한 언어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삶을 바꾸려는 의지 대신 체념을 배우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정론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에 대한 찬양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옭아매는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일어서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갈 힘과 확신을 주는 반석이다.
이는 인간의 책임을 무력화시키는 숙명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더욱 담대하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 절망적인 숙명론에 갇힌 영혼들에게 참된 자유와 소망을 선포하는 이유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