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라본 두 대륙의 신앙
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나는 늘 깊은 묵상에 빠진다. 한쪽은 유럽, 다른 쪽은 아시아. 두 대륙이 만나는 이 경계선에서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듯,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거대한 신앙의 물줄기가 이곳에서 만나고 부딪혀 왔다.
‘술탄아흐메트’ 모스크의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와 근처 그리스 정교회 성당의 종소리가 동시에 들릴 때, 같은 하늘로 올려지는 두 기도 소리지만, 그 신학적 의미는 천양지차다. 하나는 알라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의 완전한 복종(이슬람)을 외치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한 번은 대학교에서 이슬람 신학을 연구하는 ‘메흐메트’ 교수와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내게 물었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길이 이렇게 달라야 합니까?" 그의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지난 1400년간 지속되어 온 두 종교 간의 근본적 차이가 압축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
이슬람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우히드'(Tawhid), 즉, 알라의 절대적 단일성이다. 꾸란은 분명히 선언한다. "말하라, 그분은 알라시니 유일하신 분이시라. 알라께서는 절대자이시니 낳지도 않으시고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자는 아무도 없느니라"(112:1-4). 이 구절은 모든 모스크마다 새겨져 있으며, 모든 무슬림이 가진 신앙고백의 핵심이다.
한 번은 튀르키예의 중앙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한 데르비시(신비주의 수도자) 하산은 이렇게 설명했다. "알라는 너무나 거룩하고 초월적이시기에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복종하고 경배할 뿐입니다." 그의 말에서 나는 이슬람 신학의 철저한 초월 신관을 느꼈다.
반면,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이슬람처럼 단일 신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신다. 이는 단순한 수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심을 보여주는 신학적 진리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 놀라운 진리를 선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에게해 지역의 한 대학에 다니는 유수프는 이전 무슬림 배경에서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이런 간증을 나누어 주었다. "제가 이슬람에 있을 때는 알라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어요.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이 사랑 자체이며,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고백에서 두 종교의 신관이 얼마나 다른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구원론의 근본적 차이
이슬람에서 구원은 '다섯 기둥'의 실천과 선행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부근 부르사 지역의 한 이맘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하루 다섯 번 기도), 자카트(희사), 사움(라마단 금식), 핫지(성지순례)를 통해 알라께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심판 날에 알라의 자비를 구하죠.”
꾸란 2장 82절은 이슬람의 구원관을 잘 보여준다.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은 천국의 주민이니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하리라." 여기서 '믿음'과 '선행'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는 인간의 노력과 알라의 자비가 조화를 이루어 구원이 성취된다는 사상이다.
불가리아 국경 인접한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모스크에서 금요 기도를 마친 한 무슬림 청년 아흐메트는 내게 이러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살려고 하지만, 과연 제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있어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 에베소서 2장 8-9절의 선언은 명확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흑해의 트라브존에서 만난 무슬림 배경을 가진 다니엘 목사는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30년 동안 독실한 무슬림으로 살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은 순간, 비로소 완전한 평안을 얻었어요. 이제 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계시와 성경관의 차이
이슬람 신학에서 꾸란은 알라의 직접적이고 완전무결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성경 속, 이고니움 자리인 현 콘야의 메블라나 박물관 근처에서 만난 한 이맘은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꾸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우리 선지자 무함마드(평화가 그에게)에게 아랍어로 정확히 계시되었습니다. 한 글자도 변하지 않은 알라의 순수한 말씀이죠.”
이슬람에서는 이전의 경전들인 토라(타우라트), 시편(자부르), 복음(인질)도 원래는 알라의 말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본다. 꾸란 2장 79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자기 손으로 성서를 쓰고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하면서 적은 대가를 얻으려 한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살아있는 말씀(로고스)이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이 진리를 선포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지중해 연안의 유명한 해안 도시, 안탈야에서 개최되었던 한 세미나에서 튀르키예 개신교 목사가 이렇게 간증했다. “저희에게는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시거든요.”
예수에 대한 이해 차이
이것이 두 종교 간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이슬람에서 예수(이사 알-마시흐)는 위대한 선지자 중 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 십자가에서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았다. 꾸란 4장 157절은 명확히 부인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사도 마리아의 아들 예수 메시아를 죽였다' 하나 그들이 그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매달지도 못하였느니라.”
한 이맘과 대화하던 중,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르크(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실 수 없어요."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시며 참 인간이신 유일한 중보자시다. 과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의 칼케돈 신경이 고백하듯, 그분은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고, 구별되지 않게" 한 위격 안에 결합되신 분이다.
튀르키예의 동부, 디얄바크르의 한 지하교회에서 만난 회심자, 파티마라는 여성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간증했다. “저는 30년 동안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그분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론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도행전 4장 12절 역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이슬람에서 인간과 알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압드'(종)와 '랍'(주인)의 관계다. 튀르키예 동남부의 아다나의 한 모스크에서 만난 하피즈(꾸란 암송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알라의 종입니다. 종의 의무는 주인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죠. 이것이 이슬람의 본질입니다.”
이렇듯, 이슬람에서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복종' 또는 '순종'을 의미한다. 꾸란 곳곳에서 "알라께 복종하라"는 명령이 반복되며, 이는 신앙의 핵심 덕목으로 여겨진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규정된다. 갈라디아서 4장 6-7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랜 기독교 지역으로 알려진 동남부 마르딘의 한 시리아 정교회에서 만난 아시리아 기독교인 할머니는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 조상은 1600년 동안, 이 땅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해 왔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시거든요.”
신학적 방법론의 차이
이슬람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또 다른 점은 신학적 방법론이다. 이슬람 신학은 철저히 계시 중심적이다. 꾸란과 하디스(선지자의 언행록)에 기록된 내용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며, 인간의 이성은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도구일 뿐이다.
튀르키예의 카이세리에서 만난 이맘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꾸란은 모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은 꾸란의 진리를 확인해 줄 뿐이죠. 꾸란에 어긋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반면, 기독교 신학은 성경을 최고 권위로 인정하되,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한 개인적 경험과 공동체의 해석 전통, 그리고 상황적 적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듯,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교회 공동체의 지혜가 필요하다.
종말론적 차이
두 종교의 종말론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최후 심판이 강조된다. 꾸란 99장은 이렇게 묘사한다. “누구든지 티끌만큼의 선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요, 누구든지 티끌만큼의 악을 행한 자는 그것을 보게 되리라.”
반면,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 새 땅의 소망이 중심이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의 약속은 이렇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십자가의 길과 미나렛의 길
이스탄불의 해질녘, 갈라타 다리에서 바라본 구시가지의 풍경은 언제나 나를 깊은 묵상으로 이끌곤 했다. 술탄아흐메트 모스크의 여섯 개 미나렛이 하늘로 솟아있고, 그 옆에는 아야소피아의 돔이 천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서 있다. 한때 기독교 교회였다가 모스크가 되었던 이 건물만큼 두 종교의 복잡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은 변할 수 있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분명 다른 길이다. 하나는 십자가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미나렛의 길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내려오신 성육신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순종의 길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신학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