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쉽게 훼손되는 지명, 사라지지 않는 지명
앞서 ‘역사는 나라 영역의 변천기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오늘 다시 그 제목의 기사에서 초점을 맞추었던 “요(遼)” 나아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좀 더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 요동과 요서에 대한 오해는 요수와 요하에 대한 무지와 맞물리기 때문에, 꽤 상세한 예문과 통찰이 필요하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필자는 70년대 사회에 발을 내디디며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외국인도 만나며 나름 세계적 시각을 넓히면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도 이것저것 하였고, 훗날 그때 생각이 늘 맞았다는 쾌감도 경험하였다. 그 통찰의 하나가, 아직도 해소 전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는 섬”이라는 통찰이다. 현실적으로 지구의 가장 거대한 대륙과 떨어진 것은 아니나, 대륙을 걸어서 가지 못한다면 그곳은 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이 통할 듯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네 보았지만 학자부류가 오히려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나라 학계 일부를 대상으로 흉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고의 씨앗이 없다면 우리나라 사회현상, 정치 현실, 국민들의 심리적 변화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러한 사실에 대한 연구가 없으니, 출산률이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게 왜 낮은지, 자살률이 왜 높은지, 청년들은 왜 장래 희망을 포기하는지 파악할 수 있겠는가?
답답하여 국민 직접 관심을 끌어내 보자고 생각하며, 이 신문의 카테고리에 ‘역사와 지명’ ‘역사와 언어’를 설정한 것이다.
역사와 지명 이야기는 작은 직접 경험에서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사셨고 묻혔던 동네는 ‘고드내’라고 했다. 교통 불편하던 시대에는 가볼 기회가 없어, 무슨 뜻일까 궁금하였다. 벌초할 책임을 지는 나이가 들어 가보니 ‘직천리(直川里)’라는 이정표를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곧은 내’가 발음의 편이상 ‘고드내’가 되었고, 주권상실기 때 일본인이 행정편의로 재구성한 지명이었다. 현재는 군의 포격연습장으로 수용되어 마을 전체가 소개되었으니 고드내라는 마을이름은 영원히 사라질 운명이다. 아마도 우리가 삼국사에서 볼 수 있는 지명 대부분 그런 상태일 듯하다.
그 마을과 멀지 않지만 정작 아버지가 출생한 마을에는 샘내라는 이름이 있다. 비록 그 마을도 노인들은 사라졌어도 주민은 계속 살고 있으니 이름은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곳으로 앞의 할아버지 유골을 옮길만큼 인연이 있는 마을이지만 그 샘내 역시 어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평소 물이 꽤 흐르지만, 날이 가물었을 때는 꽤 폭이 넓은 내임에도 물줄기가 없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바로 동네 아래는 늘 물이 마르지 않았다. 즉 산소가 있는 동네에서는 물이 줄면 사라지기도 하나, 아랫동네는 다시 솟아나와 늘 물이 흐르는 동네라서 샘이 솟는 내라는 샘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일 게다.
다음 기회로 넘길 기사이지만, 연산산맥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지명 변조의 뿌리가 되는 고대 “연(燕)”나라는 후대인 오대십국 시절의 후연, 북연과 같은 산서성 태원지역(晉中)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 지명변조가 성공적이지 못함을 보여준다. 즉 소수의 사람을 잠깐 속일 수는 있으나, 다수를 계속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다.
요동성이 요주로 바꾸었다는 구당서 동이전
먼저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 좌권으로 바뀐 지명은 습관적으로 1950년까지도 사용되었던 듯하다. 백도(百度; 바이두)라는 포탈을 뒤적거리다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 요(遼, 일반적으로는 遼州)가 요동성이었다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시작한다.
舊唐書 卷199 上, 列傳 第149 上, 東夷: 高麗 百濟 新羅 倭國 日本
(太宗 十九年) 李勣軍渡遼,進攻蓋牟城,拔之,獲生口二萬,以其城置蓋州。 … 李勣進軍於遼東城。 … 帝渡遼水,詔撤橋梁,以堅士卒志。帝至遼東城下,見士卒負擔以填塹者,帝分其尤重者,親於馬上持之。從官悚動,爭齎以送城下。時李勣已率兵攻遼東城。(서기 645년)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개모성으로 진공하여 함락시켰다. … 이적의 군대는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황제가 요택에 행차하여 … 국내[성]과 신성의 보병과 기병 4만이 와서 요동성을 구원하였다. … 황제는 요수를 건너자 조서를 내려 교량을 철거하도록 함으로써 사졸의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황제가 요동성의 아래에 이르러서는, 사졸이 짐을 지고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그 중의 가장 무거운 짐을 나누어 친히 말 위로 옮겨 [나르니], 따르던 관인이 놀라 움직이면서 다투어 [짐을] 날라서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帝親率甲騎萬餘,與李勣會,圍其城。俄而南風甚勁,命縱火焚其西南樓,延燒城中,屋宇皆盡。戰士登城,賊乃大潰,燒死者萬餘人,俘其勝兵萬餘口,以其城為遼州。황제가 친히 갑옷 입은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이적과 만나 그 성을 포위하였다. 얼마 뒤 남풍이 매우 세차게 불자 명을 내려 불을 질러 그 서남쪽 전루를 태웠다. 불길이 성 안으로 잇달아 번지면서 집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은 곧 크게 무너졌다. 불타 죽은 자가 만여 인이었고, 그 정병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번역은 1988년 발행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중국정사조선전”을 옮겨 적음]
위의 기사가 등장하는 645년 이전의 요동은 그 자체로 지명이었을 수 있으나, 그 요의 동쪽을 뜻하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이후는 요주로 존재하면서 지배자에 따라 지명이 바뀌었다. 구당서 지리지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이 변화무쌍하였다.
시행년도 | 원문 | 번역문 |
| 遼州 隋太原郡之遼山縣 | 요주(遼州)는 수(隋)나라 때 태원군(太原郡)의 요산현(遼山縣)이었다. | |
武德三年 620 | 分並州之樂平、和順、平城、石艾四縣置遼州,治樂平 | 무덕(武德) 3년에 병주(並州)의 낙평(樂平)·화순(和順)·평성(平城)·석애(石艾) 네 현을 나누어 요주를 두고, 낙평을 치소로 삼았다. |
| 置義興縣 | 그해 의흥현(義興縣)을 설치하였다. |
ㆍㆍ六年 623 | 自樂平移於遼山,仍以石艾、樂平二縣屬受州,省義興縣,以廢榆州之榆社、平城二縣來屬 | 낙평에서 요산으로 치소를 옮기고, 석애와 낙평 두 현을 수주(受州)에 속하게 하였으며, 의흥현을 폐지하고 폐지된 유주(榆州)의 유사(榆社)·평성(平城) 두 현을 이속시켰다. |
ㆍㆍ八年 625 | 改遼州為箕州 | 요주를 기주(箕州)로 고쳤다. |
先天元年 712 | 又改為儀州 | 다시 의주(儀州)로 고쳤다. |
天寶元年 742 | 改為樂平郡 | 낙평군(樂平郡)으로 고쳤다. |
乾元元年 758 | 復為儀州 | 다시 의주로 하였다. |
中和三年 883 | 復為遼州 | 다시 요주로 고쳤다. |
그럼에도 함께 등장하는 지명으로 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는 산서성을 벗어난 흔적이 없어 앞서 기사에서 대청광여도, 우적도, 송본지리지장도로 보여드린 요(遼)의 위치를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백제 역사로 확신하는 요동, 요서

역사상으로 등장하는 어느 사서의 기록도 한 나라가 요동과 요서를 차지하였다는 기록은 아마도 백제가 유일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삼국사에는 없고, 저 서토의 사서인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및 남사(南史)에 기록되었다.
宋書 卷97 列傳 第57 夷蠻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畧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 晉平縣.
송서 권97 렬전 제57 이족과 만족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나중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니 백제가 요서를 경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梁書 卷 第54 列傳 第48 諸夷 海南諸國 東夷 西北諸戎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량서 권 제54 렬전 제48 여러 이족, 해남의 여러 나라, 동이족, 서북의 여러 융족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그 땅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南史 卷79 列傳 第69 夷貊下 東夷 西戎 蠻 西域諸國北狄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남사 권79 렬전 제69 이맥족 하: 동이족, 서융족, 만족, 서역의 여러 나라 북적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그 땅을]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번역은 “국역 중국정사조선전”을 옮겨 적음]
송서의 문구로는 요서를 쳐서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량서와 남사는 ‘요서와 진평’인지, 아니면 ‘요서의 진평’인지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진평은 앞서 인용한 기사 외에는 찾을 수 없어 진평을 배제한다면, 요서에 존재하는 진X와 평X인 두 지명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지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지명은 진양과 평양(平陽)이 된다. 晉이 일단 멸망 상태로 호남ㆍ북 지역으로 밀리며 전개되는 오호십육국 시대상황과도 어울린다. 즉 거품처럼 명멸하는 이름뿐의 나라들을 누르고 들어가 요서를 점령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수없이 많은 지명이 요동에 있다는 기록
많은 기록을 모두 옮길 수 없어 몇 례만 오려본다.
남제서 : 광양(廣陽), 조선(朝鮮), 대방(帶方), 광릉(廣陵), 청하(淸河), 낙랑(樂浪), 성양(城陽)
구당서 : 항성(項城, 웅진熊津, 대산大山, 동명東明, 박성薄城, 제성諸城, 백마(白馬)
삼국사 백제본기 : 석문(石門), 평원(平原), 황산(黃山), 사자하(泗泚河), 숭산(崇山), 독산(獨山), 동성(桐城), 잠산(岑山), 덕안(德安)
이상하게도 요(현재 좌권)의 위도를 그어놓고 사서에서 요동으로 이해되는 지명을 관찰하면 남북에 대한 표지는 없지만 ‘요동’이라는 지역명은 강조하고 있음이다. 추정해 본다면 요(遼)란 문자 그대로 저 서토인들에게 먼 곳이라는 사고와 함께 ‘남의 땅’이라는 인식과 함께, 그곳은 동쪽이라는 사고가 중첩되어 생겨난 일반명사일 수도 있겠다.
요하라는 지명의 기원을 알 수 없음
사서명 | 요수 | 요하 | 요해 | 요택 | 요주 | 요동 | 요서 | 사서명 | 요수 | 요하 | 요해 | 요택 | 요주 | 요동 | 요서 |
| 사기 | 0 | 0 | 0 | 0 | 0 | 32 | 8 | 오대사(구, 신) | 0(1) | 0 | 0 | 1(0) | 37(12) | 4(2) | 0 |
| 한서 | 0 | 0 | 0 | 0 | 0 | 33 | 16 | 송사 | 0 | 0 | 2 | 1 | 36 | 8 | 1 |
| 후한서 | 0 | 0 | 1 | 0 | 0 | 104 | 27 | 요사 | 3 | 15 | 2 | 5 | 12 | 30 | 40 |
| 삼국지(위략) | 3(3) | 0 | 0 | 0 | 0 | 134 | 20 | 금사 | 8 | 5 | 6 | 1 | 18 | 127 | 4 |
| 위서 | 0 | 0 | 10 | 0 | 0 | 36 | 70 | 원사 | 4 | 7 | 3 | 0 |
| 128 | 6 |
| 진서 | 5 | 0 | 1 | 0 | 0 | 84 | 48 | 명사 | 2 | 17 | 27 | 0 |
| 561 | 0 |
| 수서 | 9 | 0 | 0 | 1 | 1 | 142 | 12 | 청사고 | 9 | 98 | 8 | 2 |
| 119 | 5 |
| 당서(구, 신) | 6(7) | 0 | 8(4) | 3(3) | 16(8) | 92(78) | 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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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 | 12 | 0 | 2 | 2 | 97 |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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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사 | 2 | 1 | 4 | 0 | 133 | 2 | |||
요동과 요서라는 지명의 모든 혼란의 출발은 ‘요’나라가 패권국이 되었고, ‘요수’라는 지명 대신에 ‘요하’를 갑자기 사용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앞의 표에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은가? 다만 왜 요하라는 이름이 현재 요녕성에 흐르는 물줄기 이름이 되었는가 아직 밝히지 못하였다.
이야기를 다음 계속되지만 위 표를 제시하며 함께 연구하기를 제안한다. 이 표에 제시하는 숫자는 필자가 세어본 것이므로 절대적 통계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의문을 갖게 하는 자료로는 충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