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슬람의 기도 소리(아잔)가 울려 퍼지는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햇볕에 그을린 현지 무슬림 친구들과 따뜻한 차를 나누며 ‘이싸(예수)’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던 수많은 밤은, 내 신앙의 여정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깊이 존경하며,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그분께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경건한 수식어를 덧붙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름은 같지만 그 실체는 너무나 다른, 두 신앙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마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이 두 세계의 중심에 자리한 이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건네는 가장 근원적인 구원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선, 우리는 두 신앙이 공유하는 놀랍도록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무슬림 친구들은 꾸란을 근거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 그리고 그의 흠 없는 삶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를 ‘메시아(알-마시흐)’이자 ‘하나님의 말씀(칼리마툴라)’이라는 특별한 칭호로 부르며,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한다. 이것은 마치 두 명의 화가가 한 폭의 캔버스에 같은 산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멀리서 보면, 두 그림은 매우 흡사하다.
산의 장엄한 윤곽과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의 모습은 거의 동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슬람이 예수에게 부여하는 이 높은 지위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하면서도 때로는 놀라움을 준다. 우리의 소통은 바로 이 공통의 기반, 즉 무슬림 친구들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는지를 먼저 겸손하게 경청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두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세부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하면,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나며 두 그림이 결코 같은 산을 그린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차이는 그림의 가장 중심부, 바로 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는 ‘십자가’와 ‘신성’의 문제이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단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단언한다(꾸란 4:157). 그들에게 십자가는 위대한 예언자에 대한 신의 보호하심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치욕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심장은 바로 이 십자가에서 고동친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며, 저주가 아니라 사랑의 절정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시며, 자신의 사명이 바로 이 희생적 고난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셨다. 만약, 이슬람의 ‘이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회피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한 선지자라면, 성경의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고난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결정적 차이인 ‘신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슬람은 그 무엇보다 절대적인 유일신 사상(타우히드)을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가장 끔찍한 신성모독(쉬르크)으로 여긴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단지 뛰어난 예언자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신(使臣)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God Himself)이시다. 이슬람의 신앙 체계에서 구원은 마지막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따르는 ‘선지자 중심적 구원론’에 기반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무슬림 친구들에게 ‘이싸’는 따라야 할 위대한 모범이지만, 기독교인에게 ‘예수’는 경배하고 의지해야 할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기독교라는 종교 체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는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준다. 우리는 무슬림 친구들이 가진 예수에 대한 지식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파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지 인정하되, 그 그림의 핵심에 빠져 있는 결정적인 조각, 즉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의 신성을 채워 넣어 그림을 완성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은 논쟁이 아닌 사랑으로, 강요가 아닌 섬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북아프리카에서 한 동료 선교사가 이슬람의 ‘사부아(sabua)’라는 아기 이름 짓기 의식을 통해 복음을 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난 지 7일째 되는 날, 아버지가 양의 목을 베어 그 피를 흘리며 아기의 이름을 불러야만 비로소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풍습을 통해, 그는 “바로 예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부아’였다”라고 설명했다.
그 순간, 이슬람 문화 속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속의 피’라는 개념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갔다. 우리의 사명은 이처럼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 숨겨진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ies)’를 발견하여, 그들이 자신의 언어와 그림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돕는 것이다.
결국, 이슬람의 ‘이싸’는 십자가 없는 메시아이며, 신성 없는 구원자이다. 그는 존경스럽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 그는 길을 가리키는 위대한 표지판일 수는 있으나, 그 자신이 길이 되지는 못한다.
오랜 세월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하며, 나는 그들이 가진 예수에 대한 존경심이 오히려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가장 큰 장벽이 되는 역설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들이 아는 ‘이싸’가 너무나 뛰어나기에, 그 이상의 예수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들이 아는 선지자 ‘이싸’를 넘어, 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날을 위함이다. 그들이 가진 그림에 마지막 한 조각, 바로 십자가가 채워질 때, 비로소 그 그림은 생명을 얻고 완성될 것이다.
만약, 무슬림들의 ‘이싸’가 우리가 믿는 예수라면, 그 ‘이싸’ 역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한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이싸’는 그렇지 않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예수는, 당신의 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줄 수 있는 분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분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