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평온하던 도심 한복판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역주행한 차량이 인도를 덮치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걷던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80대 노인.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뱉은 첫마디는 “브레이크가 안 들었다”였지만, CCTV는 그가 엑셀을 밟았음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35년 경찰 제복을 입고 수많은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아스팔트 위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차량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최근 시청역 역주행 참사 등 고령 운전자 사고가 잇따르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인터넷 댓글 창에는 “살인 면허다”, “노인들은 무조건 운전대를 뺏어야 한다”라는 분노 섞인 혐오가 넘쳐난다.
물론 노화는 부정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나이가 들면 인지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돌발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경찰청 통계를 봐도 고령 운전자 사고 비율은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로 위의 흉기’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서 35년 베테랑의 시선으로 묻고 싶다. 무조건 면허증을 반납받는 것만이 만능열쇠일까.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하철과 버스라는 훌륭한 대체재가 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나 농어촌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하루에 버스가 고작 두세 번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서 트럭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아픈 아내를 태우고 읍내 병원에 가야 하고, 일 년 내내 땀 흘려 농사지은 배추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하는 ‘생존의 도구’다. 그런 그들에게 대안 없이 차 키를 내놓으라는 건, 사실상 다리를 자르고 집에 갇혀 지내라는 ‘현대판 유배형’이나 다름없다.
지자체마다 반납률을 높이겠다며 지원금을 10만 원에서 30만 원, 많게는 50만 원까지 올리는 추세다. 하지만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돈은 결국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일회성 위로금’에 불과하다. 평생을 운전해 온 어르신들에게 “당신의 이동권과 자존심을 푼돈 몇십만 원에 팔라”고 강요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반납률이 2%대 제자리걸음인 건,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차를 버리는 순간 고립된다는 ‘공포’ 때문이다.
해법은 ‘강제 박탈’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기술은 충분하다. 일본이나 유럽처럼 ‘비상제동장치(AEBS)’나 ‘오조작 방지 장치’ 장착을 의무화하고 보조금을 지원하면 된다. 고속도로 운전은 제한하되 동네 주행은 허용하는 ‘조건부 면허제’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사람을 배제하는 쉬운 길 대신, 기술과 제도로 안전을 보완하는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노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혐오의 시선을 거두는 일이다. 지금 운전대를 뺏으라고 소리치는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늙는다. 누구나 늙고, 누구나 느려진다. 노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미래의 내가 갇히게 될 감옥이다.
도로 위의 안전이라는 ‘생명권’과 노인의 발이 되어주는 ‘이동권’. 이 두 가치는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수 없는 소중한 인권이다. 지원금 몇 푼 쥐여주고 등을 떠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전하게 엑셀에서 발을 뗄 수 있도록 진짜 ‘대안’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품격 있는 사회가 가야 할 길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전준석 칼럼니스트는 경찰학 박사이자 35년간의 경찰 생활을 총경으로 마무리한 치안 행정 전문가다. 현재 한국인권성장진흥원 대표로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인사혁신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 주요 기관에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인지 감수성, 폭력 예방, 리더십 코칭, 생명 존중 및 장애인 인식 개선 등 폭넓은 주제로 사회적 가치를 전파하는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범죄심리학’, ‘다시 태어나도 경찰’, ‘그대 사랑처럼, 그대 향기처럼’, ‘4월 어느 멋진 날에’ 등이 있다. 경찰관으로 35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있음을 몸소 깨달았다. 우리 국민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인권이 성장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삼시세끼 인권, 전준석 칼럼]을 연재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