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話頭)는 본래 불교 용어지만 현대에 와서는 화제, 이슈(Issue)같은 의미로 전화되어 “요즈음은 일자리가 화두가 된다”는 식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런 화두를 붙잡고 늘어지는 수행방법인 참선(參禪)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9세기 중국 당나라의 임제의현(臨濟義玄)에 의해 창시된 중국 불교 선종(禪宗) 5가(家)의 한 종파로서 깊은 의심을 통해 정신을 극도로 집중시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수행법으로써의 화두(話頭)는 “말(話)보다 앞서는(頭) 것”을 뜻하는데, 말 그대로 생각이나 말을 떠올리기 전에 존재하는 자신의 마음을 찾아내는 방법이 불교의 화두 수행법이라고 한다. 이러한 화두 수행법은 간화선(看話禪)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말 그대로 화두(話頭)를 보면서 공부한다는 뜻이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화두는 “태어나기 전의 내 모습이 무엇인가”, “이빨에 털이 났다” 등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 등을 뜻한다. 화두 수행자는 이러한 화두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수행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화두는 옛날 조사(祖師)들이 남긴 어록에서 유래된 것들이라고 한다.
화두의 기본적인 형태는 제6대 조(祖), 혜능(慧能) 조사(祖師) 이후, 당시의 선사(禪師)들이 남긴 어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글귀 등을 던지곤 했다. 이 질문들은 대부분 상식으로는 절대로 대답이 나올 수 없는 것들인데, 인간의 언어로 형상과 개념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제자들 중에는 그냥 그 질문 하나만 듣고도 곧바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경지를 깨닫는 제자도 있단다.
지금 우리가 아는 화두수행(간화선)은 남송(南宋) 시대의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정립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남송의 선종은 구두선(口頭禪)을 비롯한 각종 사이비 수행승들이 넘쳐나면서 말기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종고(宗杲) 선사는 그때까지의 역대 조사들이 남긴 어록을 화두로 이용해 제자들을 지도했다. 간화선은 스승에게 제대로 자신의 경지를 검증받을 수 있다는 점과 화두를 일단 줘 놓으면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므로 편지 등을 이용해 원격으로 가르치기에 좋다는 점에서 수도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던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또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 굳이 경전이 필요없기 때문에 글을 몰라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에 의해 간화선 중심의 수행이 정립된 뒤 오늘날까지 참선과 함께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종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조계종과 태고종에서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간화선을 거의 유일한 수행법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의두성리(疑頭性理)라는 이름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며,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朴重彬) 소태산(少太山) 대종사(大宗師)가 의두성리(疑頭性理)에 가까운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단다. 물론 모두가 의두성리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단전호흡과 묵조선식(默照禪式) 지관타좌(只管打坐)를 조화시킨 단전주(丹田住)라는 명상도 한단다.
화두에 대한 이런 복잡한 설명은 오히려 화두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한다. 그래서 아주 쉽고도 간단한 예를 하는 들어보겠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애들이 말을 배우고 호기심이 늘어나면 누구나 이런 난감한 질문을 받았을 때가 있을 것이다.
“아빠 하나님은 나이가 몇 살이야?”
“셀 수 없이 많지. 아마 몇 천 살은 되고도 남을 것이야.”
“그러면 그렇게 오랫동안 뭘 먹고 살아?”
“하나님은 공기만 먹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으므로 먹는 걱정은 없어.”
“하나님은 공기를 먹고도 사는데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왜 밥을 먹어야 사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런 질문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아빠들은 두손 두발 다 들고 만다.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수행법은 쉽게 말하면 아이들이 물고 늘어지는 이런 식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당장이라도 스스로에게 이런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물고 늘어져 보라.
“삶이란 무엇일까? 타고난 본능대로 사는 것이지, 그러면 본능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신(神)의 영역이지. 그 신(神)은 어떤 존재인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허상이지. 그 허상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무언가를 견성(見性)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풀리지 않는 어떤 의문이 생긴다면 이 간단한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하면서 답을 찾아가 보라. 틀림없이 얼마 후 스스로 견성(見性)한, 즉 스스로 득도한 선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손 영일 컬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