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설교를 바탕으로 역대하 7장 성전 봉헌과 환난 속 기도, 디모데후서 4장 바울의 인간미와 화해를 연결해 오늘의 교회 회복과 선교를 성찰한다. 그리고 실제적인 신앙의 길을 제시한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목사의 설교를 따라가다 보면, 성경 본문이 단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다시 배치하는 ‘사건’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역대하 7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고 난 뒤 하나님께서 밤에 나타나 “내가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다”고 선포하시는
장면을 붙들고, 성전과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그
물음은 건축과 제도, 조직과 운영의 언어를 넘어선다. 성전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표지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라고
선언하시는 임재의 표지판이며, 그 임재 앞에서 인간이 가장 정직해질 수 있는 통로가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성전을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통로”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전이 사람의 손으로만 완성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내려오셔서 만남을 허락하시는 거룩한 접점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성전의 원형을 야곱의 벧엘 체험에서 찾는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의 길 위에 선다. 가족도
안전도 내일에 대한 확신도 희미해진 자리에서 그는 돌을 베고 누웠고, 꿈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았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시며, 야곱을
단절의 인생에서 언약의 인생으로 옮겨 놓으신다. 야곱이 깨어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 고백하며 그 자리를 벧엘이라 부른 사건은, 성전이란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이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의 불안과 추위 속으로 내려오시는 은혜의
사다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의
해석에서 성전은 특정 공간을 신성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방식이 ‘장소’를 통해 구체화된 사건이다.
그래서 성전은 단지 ‘거룩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길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포개지는 지점이다.
이 관점에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은 국가적 행사나 종교적 의례 이상의 의미를 띤다. 왕의 권위와 나라의 부강함을 과시하는 장면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장재형목사는 그 장면을 인간의 업적을 승인받는 의식으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가 택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전이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의되는 순간, 성전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회개의 자리이자 회복의 자리, 곧 기도의 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 기도의 본질은 환난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역대하 7장 13-15절에서 하나님은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는 때, 메뚜기가
토산을 먹어 치우는 때, 전염병이 번지는 때를 언급하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런 재난의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만일”이라는 조건절로 재난을 가정하시면서도, 동시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절망을 반전시키는 문장’으로 읽는다. 죄가 만들어 낸 폐허가 아무리 깊어도, 겸비함과 회개와 간구가 하나님을 향해 열릴 때 하늘은 다시 열린다. 기도는
재난을 부정하는 주문이 아니라, 닫힌 하늘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는 결단이며, 그 결단을 통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듣고” 역사하신다는 약속이 성전 신앙의 심장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이 약속을 현대의 언어로 확장할 때, 그 메시지는 더욱 절실해진다. 팬데믹과 경제적 불안, 공동체의 분열, 예배의 형태가 흔들리는 시대적 압력 속에서 많은 성도는 “이제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섰다. 장재형목사는 그 질문을 역대하 7장의 언약으로 되돌려 놓는다. 하나님은 재난의 한복판에서도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억지로 붙잡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겸비함으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확신이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고 조건이 열악해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그 마음은 성전이 되고, 그 자리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된다. 이때 성전은 특정 지역의 건축물로만 남지 않는다. 예배당이든 가정의
식탁이든, 병상 곁의 침묵이든, 두세 사람이 눈물로 손을
맞잡는 골방이든,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곧 임재의 자리로 변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성전의 역동성이다. 성전이 한 지점에만 고정되는 구조물이라면, 시대의 위기 앞에서 신앙은 쉽게 막다른 골목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역대하 7장을
읽으며 강조하는 임재의 원리는, 하나님이 특정 좌표에 묶이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신약의 사도 바울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듯이,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의 삶을 거처로 삼으시고,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예배할 때 그 가운데 거하신다. 그렇기에 예배당은
여전히 소중한 ‘공동의 집’이지만, 예배당이 닫힌 순간에도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화면 너머로 흩어진 예배의 시기에도,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자리에 성전의 본질이 살아 있음을 말하며,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영적 연대의 언어로 넘어설 수 있다고
권면한다.
그리고 “내 얼굴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주문이 아니라 관계 회복을 위한 초대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과’만을 달라고 조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찾는 행위이며, 그분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정직하게 내려놓는 고백이다. 그래서 겸비함은 자책이 아니라 진실이고, 회개는 과거에 매이는 벌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문이며, 간구는 무력함의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연결된 존재의 특권이다. 이러한 기도의 언어가 성전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반복될 때, 공동체는 환난을 해석하는 방식부터 달라지고, 절망을 대하는 태도부터 새로워진다.
그렇다고 장재형목사가 공간과 건축의 의미를 가볍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가 예배의 처소를 마련하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일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사야 56장 7절의
표현은, 성전이 배타적 울타리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이를 품는 개방된 집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건물을 세울 때 그 건물이 스스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공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통로이자 선교의 발진 기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올리벳밸리(Olivet Valley) 같은 사례를 언급할 때도, 그는 규모의
과시가 아니라 ‘기도의 인프라’를 세우는 비전을 말한다. 세계 교회가 한마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복음의 전략과 사랑의
실천을 함께 준비할 수 있는 영적 센터,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하나의 찬양으로 합쳐지는 공간, 그리고 다음 세대가 믿음의 기억을 전수받는 자리로서의 성전을 꿈꾸는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언어에서 건축은 곧 ‘기도의 인프라’이며, ‘선교의
플랫폼’이다.
장재형목사가 교회의 본질을 선교로 규정하는 대목은, 성전 이해를 정지된
공간에서 움직이는 사명으로 옮겨 준다. 초대교회는 예배로 모였지만, 그
모임의 끝은 늘 흩어짐이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거리로 나가 복음을 전했고, 사랑과 구제를 통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장재형목사는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모이는 예배가 깊어질수록
흩어지는 삶은 더 빛나야 하며, 본부를 세우는 목적은 규모 확장이 아니라 파라처치(parachurch)적 정신을 품고 세상을 섬기기 위함이다. 환난의
시대에 하나님이 교회에 묻는 질문은 “얼마나 웅장한 성전을 세웠느냐”가
아니라, “그 환난 속에서 누구를 품었느냐, 어떤 사랑을
실천했느냐”라는 질문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그 질문 앞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사랑과 선교의 방향으로 재정렬한다.
성전이 기도의 집이라면, 기도는 곧 선교를 향해 열려야 하고, 선교는 다시 기도에서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스가랴 14장의 예언과 예수님의 감람산 담화를 함께 호명한다. 스가랴 14장 4-5절에서 예언자는 환난의 때에 피난처가 열리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실 것을 말한다. “그 날에 그의 발이 감람산에
설 것”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종말과 재림, 환난의
징조를 말씀하신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예언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목자의 음성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도 하나님이 영적인 피난처를 주신다고 말한다. 피난처는 단지 물리적
안전지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 다시 말해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을 붙드는 자리다. 그래서 교회가 건물의 형태를 잃어버리거나 공동체가 흩어지는 경험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기도가 살아 있다면 성전의 본질은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위기는 ‘성전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성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신앙의 핵심을 다시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현실의 비애를 외면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어떤 공동체는 예배당을 정리해야 했으며, 어떤 성도는 절망 속에서 무너질 만큼 깊은 어둠을
지났다. 그럴 때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믿음의
리듬이다. 인간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결과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 신뢰를 드리는 태도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간증들—절망 중에 의식을 잃었던 지체를 위해 공동체가
합심하여 기도했을 때 회복의 순간을 경험했다는 이야기 같은—은, 기도가
초월적 기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기도는 공동체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서로를 향한 연민과 책임을 다시 세우며, 절망의 언어를 소망의 언어로
번역하는 영적 행위다. 기도는 때로 환경을 바꾸기도 하지만, 더
자주 기도하는 사람의 시선과 태도를 바꾸어 같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이런 성전과 기도의 메시지가 삶의 외적 구조를 다룬다면, 장재형목사가 디모데후서 4장을 통해 강조하는 메시지는 관계의 내적 구조를
다룬다. 그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서신에 담긴 인간미를 길어 올리며,
복음의 깊이는 종종 ‘강인함’이 아니라 ‘따뜻함’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디모데후서 4장 9-13절에서 바울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요청한다. 위대한 사도, 강철 같은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바울이 감옥에서 외로움을 고백하고 동역자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신앙이 인간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정화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환난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대목과, 디모데후서에서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4장 21절의 정황을 상기시키며)고 부탁하는 대목을 나란히 놓는다. 믿음의 사람도 추위를 느끼고, 배신을 경험하며, 누군가의 곁이 필요하다. 복음은 초인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새롭게 되는 길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요청하는 장면은 장재형목사에게 중요한 상징이 된다. 겉옷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게 하는
물리적 보호이고, 가죽종이에 쓴 책—성경과 기록들—은 영혼을 살리는 영적 양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삶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서는 현실적 돌봄이 필요하며, 동시에 말씀의 위로와 진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바울의 요청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이 한 문장에 장재형목사는 화해의 신학을 읽는다. 과거에 실패했던 사람, 관계의 갈등을 남겼던 사람, 공동체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다시
부르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타인의 과거를 지워 주는 능력이 아니라, 타인의 미래를 다시 열어 주는 결단이다.
사도행전 15장 37-39절을
보면, 마가를 둘러싸고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나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바울은 마가의 중도 이탈을 신뢰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았고, 바나바는
그를 다시 일으키려 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교회 공동체의 현실로 읽는다. 사역이 커지고 조직이 복잡해질수록 사람의 차이와 판단의 차이는
충돌한다. 그 충돌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바울처럼 원칙을 강조할 수도 있고, 바나바처럼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충돌 자체가 신앙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충돌 이후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이 마가를 다시 부르는 장면은, 갈등이 결국 사랑으로 변환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장재형목사는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는
고백이 단지 실무적 판단이 아니라 회복된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향기라고 말한다. 실패의 기억을
넘어 사람을 다시 불러 세우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복음의 증언이 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4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개인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관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사건임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더 넓게는 서로 상처 주고 멀어진 인간 사이의
담이 허물어진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사람이라면 인간 관계에서도 끝내 불화에 머물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화해는
감정적 미화가 아니다. 책임과 진실, 상처의 인정과 용서의
결단이 함께 요구된다. 그럼에도 복음의 방향은 배척이 아니라 회복이다.
그래서 바울이 마가를 다시 부르는 장면은, 교회가 ‘성공한
사람’만을 모아두는 동아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을 일으키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빌레몬서를 예로 들며 화해의 실천적 형태를 설명한다. 도망친
종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바울은 편지를 쓰고, 필요하다면 자신이 빚을 대신
갚겠다고 말한다. 화해는 단지 “좋게 지내자”는 감정의 제스처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려는 의지다. 장재형목사가 사랑을 “결국 남는 것”이라 부르는 이유는,
인간의 업적과 성취가 시간 앞에서 퇴색할 때에도 사랑이 남아 타인을 살리는 흔적이 되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의
현실 속에서 사람은 결국 연약해지고, 누구나 마지막 겨울을 맞이한다.
그 겨울을 넘어서는 힘은, 겉옷처럼 몸을 덥히는 돌봄과,
말씀처럼 영혼을 일으키는 진리와, 마가처럼 관계를 다시 살리는 사랑에서 온다. 장재형목사는 겨울을 이기는 영성이란 찬바람을 무시하는
강단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공동체성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한 폭의 예술적 이미지로도 환기될 수 있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은, 집을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이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두 손으로 그를 감싸 안는 장면을 담는다. 그림 속 아버지의 손은 단호함보다 자비에 가까운 온도로 내려앉아
있고, 아들의 머리는 저항을 내려놓은 사람의 자세로 아버지 품에 파묻혀 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화해의 정신은 바로 이런 손의
언어에 닮아 있다. 공동체가 누군가의 실패를 영구적 낙인으로 만들지 않고, 돌아오는 길을 열어 주며, 관계의 회복을 위해 품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이 복음의 미학이다. 바울이 마가를 다시 부르는 장면은, 렘브란트의 아버지처럼 “너는 끝내 우리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사랑의 수용을 떠올리게 한다.
장재형목사가 디모데후서 4장을 통해 겨울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계절의 추위가 곧 삶의 추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겨울은
바깥의 기온만이 아니다. 무관심과 냉소, 분열과 혐오, 관계의 단절과 신뢰의 붕괴가 마음의 체온을 떨어뜨린다. 교회 안에서도
의견 차이와 상처가 생기고, 작은 오해가 큰 갈등으로 번지며,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그 불안정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를 향한 긍휼과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기셨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요 13:34-35).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 사랑은 선택 과목이 아니라 신자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표지다.
이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장재형목사가 성전과 기도를 강조할 때 그는 예배의 감동만을 말하지 않는다. 환난
속에서 기도하는 공동체는 동시에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기도는 가난한 이의 현실을 외면하는
영적 취미가 아니라, 가난한 이의 손을 붙잡게 하는 영적 동력이다. 성전은
안전한 내부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상처를 향해 문을 열어 두는 집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본부를 세우고, 크리스천 미디어와 교육, 선교와 구제의 길을 넓히는 모든 수고가
사랑이라는 동기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흔들리면 건물도 프로그램도 결국 자기 과시로
기울 수 있고, 사랑이 견고하면 작은 헌신도 영원한 가치로 남는다. 성전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흘려보내는가’로 평가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일관된 강조다.
역대하 7장의 약속은 개인의 영적 체험을 넘어 공동체적 책임으로
확장된다.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라는 문장에서 ‘땅’은 단지 물리적 토지가 아니라 삶의 전반,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상처, 시대의
균열을 포함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환난의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땅이 고침 받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회개와
간구는 공동체의 윤리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내려놓게 하며, 다시 사랑과 정의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게 한다. 하늘이 열리는
경험은 곧 땅이 치유되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기도의 골방에서 시작된 눈물이, 거리의 상처를 닦는 손으로 이어질 때, 성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의 집’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연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임재의 신학과 선교의
윤리를 한 문장 안에 담아 말한다.
스가랴 14장의 감람산 이미지와 마태복음 24-25장의 올리벳 담화는, 장재형목사에게 두려움의 서사가 아니라 소망의 서사다. 종말론적 본문은
자주 공포의 장식으로 소비되지만, 장재형목사는 그 본문을 “하나님이 끝내 피난처를 마련하신다”는 약속으로 읽는다. 환난이 깊어질수록 교회는 더 겸비해져야 하고, 더 진실하게 기도해야 하며, 더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피난처는 도망의 명분이 아니라 섬김의 기반이다. 하나님이 숨겨 주시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숨을 고르고, 그 숨으로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피난처는 현실을 회피하는 동굴이
아니라 사명을 준비하는 성소다. 그리고 그 성소는, 주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과 이웃을 향한 책임이 함께 자라는 자리다. 장재형목사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수고를 건축의 성취가 아니라 사랑의 헌신으로 본다.
땀과 헌금과 봉사가 한 방향으로 모일 때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고, 그 집은 선교를 향해 더 넓게 열린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성전과 기도, 그리고 사랑과 화해를 하나의 축으로 엮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과 사람을 품는 실천이 균형을 이룰 때 신앙은 온전해진다.
성전의 임재를 말하면서 관계의 사랑을 놓친다면 우리는 거룩을 가장한 자기중심성에 빠질 수 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 기도의 뿌리를 놓친다면 사랑은 쉽게 소진되고 의무로 변하며, 상처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역대하 7장과 디모데후서 4장을 함께 다루는 이유는, 기도와 사랑이 서로를 보완하는 두 개의 숨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기도는 사랑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사랑은 기도를 현실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기도의 장소인 동시에 사랑의 연습장이며,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언어인 동시에 이웃을 향한 태도를 재형성하는 영적 작업이다.
이 설교가 오늘의 교회와 성도에게 던지는 도전은 결국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환난 속에서도 소망을 놓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고 겨울 속에서도 사람을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라. 우리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방향은 선택할 수 있다.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닫힌 하늘은 다시 열리고, 얼어붙은 땅은 다시 숨을 쉬며, 차가워진 관계는 다시 온기를 찾는다. 바울이 감옥에서 요청한 겉옷과
책과 마가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유는, 그것들이 곧 ‘돌봄’과 ‘말씀’과 ‘화해’라는 신앙의 핵심 요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자리이며, 기도는 그 임재를 붙드는 손이고, 사랑은 그 임재를 세상에 전하는 언어다. 환난 속에서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겨울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표지로서 살아 있는 성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