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가 본 ‘소문’의 힘
- 우리가 타인을 배제하는 이유
“그 사람 그런다더라.”
짧은 한 문장이 한 개인의 명예, 관계, 그리고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소문은 늘 사소하게 시작된다. 누군가의 ‘들었다는 말’이 또 다른 사람의 ‘확신’으로 바뀌며, 끝내는 ‘사실’의 자리를 점령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과 허위의 경계는 흐려지고, 감정과 편견이 섞인 이야기는 사실보다 더 빠르고 넓게 퍼진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W. Allport)는 “소문은 불확실성과 중요성이 곱해진 결과”라고 했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소문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불안의 배출이자 집단적 의식의 표현이다.
현대 사회의 소문은 과거보다 훨씬 구조화되어 있다.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은 “누가 말했다”보다 “얼마나 퍼졌는가”를 중심으로 진실성을 판단한다. 이렇게 퍼진 말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로 굳어지고, 그것이 다시 개인의 행동을 규정한다. 한때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경고했던 ‘진실의 정치적 파괴’는, 이제 기술의 이름 아래 일상이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인간 사회의 폭력과 배제의 원인을 ‘모방(desire mimétique)’에서 찾았다. 사람은 스스로 욕망의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따라 욕망한다. 즉, ‘욕망의 모방자’다.
이 과정에서 타인은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경쟁자가 된다. 지라르는 “모든 인간 사회의 갈등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와 타인이 같은 대상을 욕망할 때, 우리는 경쟁하며 서로를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결국 ‘희생양(scapegoat)’ 메커니즘으로 귀결된다.
집단은 내부의 긴장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가 힘들다”, “그들이 우리 사회를 망친다”라는 식이다. 이때 소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집단적 폭력의 서막’이 된다.
지라르는 “소문은 희생양을 지목하는 의식”이라고 썼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로 포장된다. 소문은 혐오를 정당화하고, 배제를 합리화한다.
SNS 시대의 ‘지라르적 희생양’은 더욱 교묘하다. 한 개인의 실수나 발언이 순식간에 왜곡되고, “사회적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 지우기(cancel)’가 벌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의의 언어’를 빌린 집단적 모방의 폭력일 때가 많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분노하는 그 순간, 철학자는 묻는다. “그 분노는 정말 당신의 것인가?”
결국 지라르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존재이기에, 진정한 자아를 잃고 폭력의 순환에 빠진다. 소문은 그 순환의 가장 쉬운 형태다.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잠시 안도하지만, 그 불안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혐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언어이자 사회 구조의 반영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말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고 했다. 즉,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순간, 사회는 이미 힘의 위계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소문은 이런 권력의 작동을 가장 비가시적으로 드러낸다. 혐오를 담은 소문은 사회적 약자를 침묵시키고, 다수의 ‘정상성’을 공고히 한다. 그 과정에서 언어는 폭력의 도구로 변한다. ‘그들’은 부정적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은 점차 ‘사실’로 굳어진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악은 평범하게 시작된다”고 했다. 일상적 대화 속 농담, 익명의 댓글, 무심한 ‘좋아요’가 모여 타인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지워버린다. 그 속에서 우리는 ‘도덕적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며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철학은 그때 묻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주인은 누구인가?”
철학은 단순히 사고의 기술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지라르는 폭력을 멈추는 길로 ‘모방의 자각’을 제시했다. 우리가 타인의 욕망을 따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칸트는 인간 존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말했고,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소문을 멈추는 일은 윤리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소비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야말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다시 철학을 호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이 인간의 말하기를 대체하는 시대, 철학은 ‘듣기’의 예술로 돌아가야 한다. 누군가의 소문을 퍼뜨리는 대신, 그의 침묵을 들어주는 것. 그것이 혐오의 시대를 넘어서는 가장 근원적인 저항이다.
소문은 인간의 욕망과 불안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사회적 거울이다. 그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이며, 때로는 집단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 “인간은 타인을 모방하는 존재이자, 그 모방의 결과로 타인을 희생시키는 존재”다.
하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한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윤리, 그리고 말의 책임을 자각하는 성찰이다.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소비하지 않고, 그 존재를 ‘목적 그 자체’로 대할 때, 비로소 혐오와 배제의 순환은 멈출 수 있다.
소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은 묻는다.
“그 소문을 믿기 전에, 당신은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 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