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2장 강해에서 조명한 오순절 성령강림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광장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탄생과 성령의 선물, 회개와 세례, 은혜의 경제공동체까지 유기적으로 묶어 읽는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목사의 사도행전2장강해는 ‘다락방에서 광장으로’라는 거대한 이동을 한 장면으로 압축하며 시작한다. 예루살렘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날, 사람들은 십자가 처형 이후 퍼진 ‘빈 무덤’ 소문을 두고 서로의 눈치를 본다. 권력은 소문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은 이웃을 의심하게 만들며, 의심은 사람을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그때 제자들이 택한 장소가 마가의다락방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다락방은 단지 위층이라는 위치가 아니라, 숨고 싶다는 마음의 고도(高度)다. 아래의 거리는 시끌벅적하지만 위층의 문은 걸쇠로 잠기고, 창문 틈 바람은 가끔씩 심장을 두드린다. 장재형목사는 이 ‘upper room’을 사건의 배경이 아니라 영혼의 압력계로 읽는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공포의 밀도 속에서 더 또렷한 빛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가장 짙을 때, 하나님은 가장 얇은 막을 찢고 들어오신다. 제자들이 그곳에서 기다린 것은 단지 안전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은, 현실적으로는 최후의 은신처를 지키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영적으로는 미래의 광장을 준비하는 훈련이다. 다락방은 도피가 아니라 예비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마취제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되 그 현실보다 더 큰 약속을 붙드는 태도다.
오순절성령강림의 시간은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사도행전 2장 강해 설교에서, 단순한 달력의 하루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은 유대 절기의 흐름
속에 박혀 있다.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드는 절기, 언어와
문화가 뒤섞이는 도시, 그 도시에 숨은 공동체. 그 모든
조건이 한 점으로 수렴할 때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전환된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뜻이 닿는 시간이다. 어떤 순간은 그저 지나가지만, 어떤 순간은 지나가며 세상을 바꾼다. 장다윗목사라는 호칭으로도 불리는
장재형은 이 전환을 ‘은혜의
시간표’로 해석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실 때 증언이
퍼질 무대까지 예비하신다. 그래서 다락방의 은밀함은 광장의 선포를 위한 전주곡이 된다. 숨는 공간이 곧 드러나는 공간으로 변하는 역설, 그 역설이 교회의
첫 문장이다. 이 역설을 이해하면, 신앙은 개인의 비밀 취미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는 공적 소명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도행전의 서술은 감각적이다. 바람이 들리고 불이 보이며 언어가
터져 나온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귀를 사로잡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눈을 붙든다. 그런데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핵심은 그 다음이다. 불과 바람이 끝이 아니라, 그 감각이 입술로 이동하면서 세계가 새로
배열된다는 점이다. 방언은 단순한 신비 체험의 장식이 아니라, ‘말씀의
접근성’이 폭발하는 사건이다. 소통의 장벽이 무너지고, 복음이 특정 언어권의 전유물이 아님이 드러난다. 바벨탑 사건이 인간의
교만이 언어를 흩뜨려 서로를 낯설게 만들었다면, 오순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어를 통해 다시 서로를 알아보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분열의 역사 위에 놓인 통합의 순간”이라 부르며, 성령시대의 탄생은 개인적 황홀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번역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번역이란 단어의 치환이 아니라 마음의 이식이다. 성령의 번역은 타자의 언어를 흉내 내는
기술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과 갈망을 알아듣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성령의 언어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한 이해’로 흘러간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을 잃는 순간, 그것은 성령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성령의 번역에 협력하지 않아서일 수 있다.
요엘2장예언은 이 사건의 언어적 해석을 제공한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구절은 성령을 특정 직분이나
특정 민족의 독점물로 두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만민’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붙든다.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 남자와 여자, 중심과 주변, 성전과
거리, 학자와 어부 사이의 장벽이 성령의 부으심 앞에서 얇아진다. 성령의
선물은 계층 이동을 위한 인간의 사다리가 아니라, 은혜가 모든 층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수직선이다. 불의 혀가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는 표현은 집단이 무정형의 덩어리로 녹아내렸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각 개인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직접적으로 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동체는
개인을 지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질 때 탄생한다. 그래서 오순절은 개인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동시에
새로워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동시에 이것은 성삼위일체의
삶으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성령은 단독으로 떠도는 종교적 에너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순종이 맞닿는 깊은 교제의 숨결로서 교회 안에 임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단지 어떤 능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한다는 뜻이며, 그 참여는 곧 관계의 회복과 환대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특별한 지점은, 이 성경적 장면을 추상적 교리로만
두지 않고 미학적 상상력으로 확장한다는 데 있다. 그는 한 폭의 명화를 소환해 오순절을 시각적으로 해설한다. 엘 그레코의 〈오순절(Pentecost)〉에서 제자들의 얼굴은 단정한
초상이 아니라 떨림과 경외의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고, 위에서 내리는 빛은 단단한 윤곽선보다 흐르는 불길에
가깝다. 그 그림은 사건을 ‘정리’해 보여주지 않고, 사건이 일으킨
‘진동’을 보여준다. 화면 위에서 하늘과 땅의
경계는 선으로 나뉘지 않고, 빛의 낙하가 사람들의 몸을 관통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그림을 통해 성령의 임재가 단순한 감정 고양이 아니라 존재론적 재배치임을 강조한다. 두려움이 사람을 움츠리게 할 때 몸은 작은 방으로 수축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몸은 다시 세계를 향해 열리고, 얼굴은 ‘말할 수밖에
없는 표정’으로 변한다. 미학은 교리를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교리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지 설명하는 또 다른 언어다. 우리는
때로 신학을 문장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신앙은 표정과 걸음걸이, 선택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엘 그레코의 붓놀림이 흔들림을 숨기지
않듯, 성령의 임재는 인간의 연약함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연약함을 통과해 새로운 용기를 낳는다.
갈릴리어부의변화는 이 재배치의 가장 분명한 증거다. 장재형목사는 “갈릴리 어부들이 갑자기 웅변가가 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였고, 여전히 투박한 억양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그들의 중심이 바뀌었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두려움이 중심을 차지하느냐, 은혜가 중심을 차지하느냐다. 베드로의첫설교는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중심의 이동에서 나온다. 그는 군중 앞에서 ‘너희가’라고 말하는 용기를 얻었다. 그 용기는 공격성이 아니라 책임의 언어였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는 말은 군중을 모욕하기 위한 구호가
아니라, 죄를 직면하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외침이다. 장재형목사가 이 대목을 “법정 드라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설교가 관객을 감동시키기 위해 사실을 꾸미는 공연이 아니라, 진실 앞에 사람을 세우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선포가 시작되면 방어적
합리화는 무너지고, 인간은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질문은 신앙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구원은 ‘나는 괜찮다’는 자기 확신에서 시작되지 않고, ‘나는 길을 잃었다’는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정직함이야말로 은혜가 들어오는
틈이라고 강조한다.
베드로가 제시한 길은 복잡하지 않다. 회개, 세례, 그리고 성령의선물. 장재형목사는 이 단순함을 ‘복음의 미니멀리즘’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신앙의 정수가 있다고 본다. 회개는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삶의 중심이 자기 보존에서
하나님 신뢰로 이동하는 결단이다. 세례는 개인적 결심의 표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소속의 표지다. 물은 씻는 도구이면서 장례의 상징이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경계선이 물 위에 그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 경계선 이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다. 인간의 의지는 변화를 원하지만 늘 자신을 되돌린다. 그러나 성령은
돌이키는 마음을 지속시키고, 회개의 방향을 습관으로, 습관을
성품으로, 성품을 공동체의 문화로 확장시키신다. 장재형목사는 “은혜는 시작의 폭발이 아니라 지속의 호흡”이라고 말하며, 성령시대가 단발성 축제가 아니라 일상의 구조를 바꾸는
장기적 혁명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혁명’은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격문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를 바꾸는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전복이다. 내가 주인이던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주가 되실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지키느라 소진되는 인생에서 해방되어, 사랑하기 위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출애굽기 32장의 ‘삼천 명’과
사도행전 2장의 ‘삼천 명’을
교차시킨다. 시내산 아래에서 율법이 깨졌을 때 삼천 명이 죽었다는 서술과, 오순절 이후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아 교회가 태어났다는 서술은 우연히 같은 숫자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율법의 장례식과 은혜의 생일잔치”라는 대비로 표현한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기에
그 거울 앞에서 인간은 자주 죽음의 현실을 발견한다. 은혜는 그 거울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거울 앞에서 무너진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다. 그래서
복음의 논리는 ‘더 완벽해져라’가 아니라 ‘나를 붙들어라’다. 사람은
자기 의로움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시작한다. 이
역설이 기독교의 심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은혜를 값싼 면죄부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에, 죄를 직면시키고도 사람을 절망에 방치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은혜는
죄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무게를 감당하고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다른 무게, 곧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다.
오순절의 열기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변화는 공동체의 탄생이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초대교회경제공동체는 낭만적 이상향이 아니라 성령의 실험실이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는 문장은 예배 순서표가 아니라 삶의 리듬을 묘사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를 ‘프로그램의 집합’이 아니라 ‘호흡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말씀은 방향을 제공하고, 교제는 상처를 감싸며, 성찬은 기억을 새기고, 기도는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전환한다. 그 리듬이 지속될 때 공동체의
경제도 새로워진다. 소유가 절대화되면 관계는 계약으로 변하고, 계약은
곧 파기와 배신을 낳는다. 그러나 성령의 시대에 소유는 관계를 섬기는 도구로 재배치된다. 사도행전 2장의 나눔은 강제적 평등주의가 아니라 자발적 책임감의
표현이다. 누군가의 필요가 공동체의 기도로 들릴 때, 재정은
계산서가 아니라 응답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경제적 전환이야말로 다락방에서 광장으로 나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길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거창한 슬로건보다도 ‘버려지지 않는’ 공동체를 향한 약속의 구현이다. 이 약속은 오늘의 교회에도 던져진 질문이다. 우리는 성장과 성공의
언어로만 교회를 설명해 왔는가, 아니면 필요와 돌봄의 언어로 교회를 다시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은혜라는 단어는 자칫 익숙해서 무뎌지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은혜를 ‘현실을 재구성하는 힘’으로 정의한다. 은혜는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향수 같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지배하던 구조를 해체하고 담대함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두려움에서담대함으로의
이동은 감정의 스펙트럼 변화로 끝나지 않는다. 두려움은 사람을 자기 보호에 매몰시키고, 담대함은 사람을 타자를 위한 위험 감수로 이끈다. 베드로가 광장에
서서 설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자기 생존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증인이 된다는 말은 자신이 본 것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증언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존재 노출”이라고 말한다. 숨길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말이 줄어들지만,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말이 늘어난다. 그 말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세상에 드러내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사랑과 함께 가야 한다. 담대함이 사랑을
잃으면 그것은 단호함이 아니라 폭력으로 변한다. 성령이 주시는 담대함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담대함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 위한 담대함이다.
방언에 대한 논의도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는 방언을 과장해 신앙의 등급표로 만들지 않으며, 반대로 방언을 조롱해 성령의 초자연성을 제거하지도 않는다. 방언은
성령의 주권 아래 나타나는 선물이며, 그 목적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증언하는 데 있다. 핵심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되는 은혜’다. 사람은 진실을 알면서도 두려워서 침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은 그 침묵을 깨뜨려, 마음에 있는 경외를 언어로 옮기게
하신다. 그리고 그 언어는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다. 방언이
개인의 은밀한 신비 체험으로만 머물면 다락방에서 끝나지만, 성령의 언어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번역될
때 광장이 열린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불은 혀 위에 머물러도 결국 발을 움직이게 한다”고 말하며, 영적 체험의 진정성은 ‘사명의 방향’에서 검증된다고 강조한다. 오늘의 시대에는 또 다른 형태의 바벨탑이
있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빠르게를 외치는 성취의 언어가 사람들의 영혼을 분열시키고, 비교와 불안을 정교한 논리로
포장하며, 마침내 관계를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령은
그 탑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도 읽힌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공의
언어’ 대신 ‘은혜의 언어’를
말하게 하고, ‘비교의 언어’ 대신 ‘감사의 언어’를 말하게 하며, ‘혐오의
언어’ 대신 ‘환대의 언어’를
말하게 하신다.
장재형목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성령은 지리를 신학화하고, 신학을 지리화한다”는 문장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열된 여러 지역의 이름들은 단순한 여행 안내가 아니라, 복음이
향할 좌표들이다. 언어가 다양하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이야기를 한 민족의 억양에 가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은 오늘의 도시와 온라인
공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락방과 광장은 더 이상 고대의 건축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현대인의 다락방은 알고리즘이 만든 취향의 방, 불안이 만든 자기
격리의 방, 상처가 만든 관계 단절의 방일 수 있다. 반대로
현대의 광장은 거리의 광장뿐 아니라 SNS, 스트리밍, 커뮤니티, 직장, 학교, 그리고
가정의 식탁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은 장소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장소의 의미를
다시 쓰게 한다”고 말한다. 성령이 임하면 사람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만을 신앙의 무대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증언과 사랑을 실천한다. 이 실천은 거대한
캠페인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거래에서
정직을 지키는 용기, 가난한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결단, 분노가
타오를 때 침묵이 아니라 화해를 선택하는 지혜. 이런 선택들이 쌓일 때 교회는 다시 광장에서 신뢰를
얻는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 장다윗목사가 강조하는 교회의 공공성은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복음의 가시성이다.
초대교회는 권력을 잡지 않았지만 도시의 양심이 되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병든 자를 품고,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며, 죽음 앞에서도 찬송했다. 그들의 담대함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힘이었다. 광장은 언제나 소음이 많고, 오해가 많고, 때로는 조롱과 박해가 도사린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이 그들의
내부에 ‘다른 두려움’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으로 바뀔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경외는 공포가 아니라 방향감각이다.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 때, 세상의 시선은 더 이상 최종 심판자가 되지 못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감각은 신자를 작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넓게 만든다.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아들의 십자가를 붙들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때, 교회는 자기 보호의 계산을 넘어 세상을
섬기는 상상력을 회복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선언은 신학적 결론이면서도 존재론적 초대다. ‘누구든지’는 모든 사람을 문 앞에 세우고, ‘부르는’은 인간의 입을 열게 하며, ‘구원’은 그 부름이 헛되지 않음을 보증한다. 구원은 단지 사후의 보험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다시 의미를 얻는 사건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다락방에서 광장으로의 이동을 공간 이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이동으로 설명한다. 숨는 정체성에서 드러나는 정체성으로, 체포될까 두려워 문을 잠그던 정체성에서 사랑 때문에 문을 여는 정체성으로, 자기 언어에 갇힌 정체성에서 타자의 언어를 배우는 정체성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령의 선물이 있다. 성령은 인간이 만든 종교적 시스템의 윤활유가 아니라, 인간을 새로 창조하는 하나님의 숨이다.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을 다시 읽는 이유는, 그 사건이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은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했고 무엇으로 유지되는지를 묻는 거울이다. 교회는 건물로 시작하지 않았다. 교회는 불과 바람과 언어, 그리고 회개와 세례로 시작했다. 교회는 두려움이 사라져서 생긴 공동체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여 탄생한 공동체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신앙의 위기를 진단한다. 우리는 종종 ‘안전한 종교’를 꿈꾸고, 갈등이
없는 신앙을 원하며, 나만의 내면적 평안에 신앙의 전부를 걸어 버린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내면으로만 가두지 않는다. 성령은 내면을 치유하시되, 치유된 내면이 다시 세상을 향하도록 밀어내신다. 다락방의 기도는
광장의 선포로 이어지고, 광장의 선포는 다시 공동체의 돌봄으로 이어지며, 공동체의 돌봄은 다시 세상의 상처를 향한 파송으로 이어진다. 이
순환이 끊어질 때 교회는 자기중심의 동호회로 축소되지만, 이 순환이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세상을 위한 공동체’가 된다. 결국
성령은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너는 아직도 문을 잠그고 있는가, 아니면
문을 열고 걸어 나갈 준비가 되었는가.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성령시대’는, 장다윗목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그가 반복해서 강조하듯, 특정 시대를
낭만화하는 말이 아니다. 성령시대는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형이다. 오순절은
단 한 번의 폭죽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에게 맡기신 호흡의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세대마다 다시 회개를 배우고, 다시 세례의 의미를 붙들며, 다시 성령의 선물을 구한다. 회개는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세례는 물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결단이다. 성령의
선물은 신앙의 장식이 아니라, 그 결단을 지속시키는 생명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을 때 신자는 자기 삶의 영역을 분리하지 않는다. 직장과 교회, 가정과 예배, 경제와 영성이 하나의 방향성 아래 통합된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경제공동체는 결국 ‘하나님 나라의 경제’가 무엇인지를 미리 보여 준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이 되고, 축적이 능력이 아니라
나눔이 능력이 되는 질서. 장재형목사는
그 질서가 이상주의가 아니라, 성령이 실제로 사람들의 손과 지갑, 식탁과
시간표를 바꾸어 놓을 때 가능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체가 서로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감수성이고, 알아차린 필요에 반응하는
실행력이다. 그 실행력은 기적처럼 갑자기 솟아나지 않는다. 말씀과
기도, 교제와 성찬의 리듬 속에서 길러진 마음이 결국 물질의 방향까지 바꾼다.
마가의다락방에서 시작된 작은 모임이 광장으로 흘러나와 세상을 바꾼 것은, 그들이
더 강력한 조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연약했고, 배경도
미약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믿었고,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실 때 교회는 ‘두려움의
언어’ 대신 ‘은혜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은혜의 언어는 상대를 정죄하기 전에 자기 죄를 직면하고, 자기 죄를 직면한 사람만이 진짜로 타자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은혜의
언어는 자기 의로움을 세우기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며, 십자가가 세워질 때 인간의 공포는 더 이상
최종적인 권세를 갖지 못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다락방에 숨어 있는가,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어떤 광장으로 보내고 계신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돌아간다. 부름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방향의 선언이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을 옮긴다는 뜻이다. 자기 확신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기 계산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두려움의 중심에서 성령의
담대함으로 옮긴다. 그 이동이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락방의 공포를 넘어 광장의 담대함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개인의 결심만으로 완주되지 않는다. 성령이 동행하실 때, 교회는 다시 태어나고, 신자는 다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