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혐오의 시대, 공감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공동체 해체의 철학적 진단
한때 ‘표현의 자유’로 포장되던 혐오의 언어는 이제 일상 깊숙이 스며든 사회적 폭력이 되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출신이나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 쉽게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한다.
SNS에서의 댓글 전쟁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감정의 폭력’이며,
한 사회의 도덕적 면역체계가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한때 ‘다름’은 사회적 다양성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름은 ‘배척의 근거’로 전환되었다.
공감의 능력이 약해지자,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능력을 잃었고,
그 자리를 즉각적인 분노와 자기확신이 대신했다.
정치권은 이를 이용한다.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고, ‘적’을 만들어내며,
혐오를 권력 유지의 에너지로 삼는다. 언론 또한 갈등과 자극을 상품화하여
‘조회수 경제’ 속에서 혐오를 유통시킨다.
결국 현대의 혐오는 개별적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 감정이다.
이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정서적 구조물이며,
그 속에서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혐오의 언어를 학습하고 소비한다.
공동체의 해체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갈등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심리적 단절’이 존재한다.
현대인의 사회심리는 ‘고립된 군중(Isolated Crowd)’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요약된다.
도시는 수많은 인간으로 붐비지만, 그들 사이에는 정서적 고립이 가득하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를 ‘소외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관계적으로는 더욱 고립된다고 분석했다.
오늘날 SNS는 인간을 연결시키는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비교와 시기, 자기 이미지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다.
공동체적 연대는 ‘팔로워 수’로 환산되고, 공감은 ‘좋아요’로 수치화된다.
그 결과, 인간관계는 ‘정서적 교류’가 아닌 ‘정보적 교환’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 어렵다.
공감이란 상대의 존재를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감정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과 불안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끊임없이 ‘비교의 대상’ 또는 ‘위협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때 발생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투사(Projective Identification)’다.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위안을 얻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타자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공동체는 ‘우리’와 ‘그들’로 분리된다.
공감의 위기는 단순히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문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 인간을 ‘세계-내-존재(Dasein)’라고 규정하며,
인간이 타자와 세계로부터 단절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존재의 질문을 망각한 존재”이며,
그 결과 타자를 ‘이해의 대상’이 아닌 ‘도구’로 인식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과잉성과 자기착취의 시대”로 진단했다.
그는 공감의 결핍을 ‘성과사회’의 부산물로 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에,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여유는 사라진다.
‘나는 괜찮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인간은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불편한 것으로 느낀다.
따라서 타인의 불행은 ‘거리두기’의 대상이 된다.
레비나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얼굴은 나를 윤리적으로 소환하는 신적 현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감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존재론적 책임으로 보았다.
즉, 공감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철학적 윤리를 잃었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화면 속 아바타로만 인식하고,
그의 고통을 실재가 아닌 데이터로 소비한다.
그 결과, 공감은 기술적 소통 속에서 해체되고,
인간은 철저히 ‘감정적 무기력’의 상태로 내몰린다.
공감의 회복은 단순히 “좋은 마음을 가지자”는 윤리적 구호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구조적 재구성이 필요한 사회적 과제다.
첫째,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식의 전달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기르는
‘감정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 교육이 필수적이다.
핀란드의 학교들은 이미 정규 수업에 ‘공감 수업’을 도입했다.
학생들이 서로의 감정을 언어화하고 경청하는 훈련을 받는다.
한국 사회 역시 입시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타인 이해 중심의 인성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미디어의 책임이다.
혐오 발언이 조회수를 올리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공감의 회복은 어렵다.
언론과 플랫폼 기업은 혐오 콘텐츠를 노출시키는 알고리즘을 개선하고,
공익적 담론을 확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시민사회의 실천이 중요하다.
공감은 제도보다 관계 속에서 살아난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작은 공동체들이 늘어날 때
혐오는 설 자리를 잃는다.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연습’이라는 말이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회적 훈련의 결과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공감은 민주주의의 감정”이라고 말했다.
공감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다.
공감은 법보다 깊은 윤리이고, 제도보다 강한 인간성의 기초다.
혐오의 시대는 단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감정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는 시대다.
공동체의 해체는 개인의 이기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인간의 감정을 조작하고 단절시키는 결과다.
따라서 공감의 회복은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공감이 회복될 때, 비로소 공동체는 다시 ‘우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다.
철학은 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가?”
그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일,
그것이 혐오의 시대를 넘어설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