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이라는 이름의 차가운 칼날
어디를 가나 '공정'이 화두다. 입시 현장에서, 취업 시장에서, 심지어는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이게 공정한가?"를 묻는다.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계산된 점수와 철저하게 분배된 비용이 정의라고 믿는 시대다. 하지만 이토록 철저하게 공정을 따지는데, 왜 우리 사회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황폐해지는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정의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정당한 몫을 주는 것이 정의라면, 그 '몫'의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만 달려 있다고 믿는 순간 공정은 타인을 배제하는 차가운 칼날로 변한다.
여기서 한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이 정말 당신만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인가? 만약 우리가 정의를 바라보는 시선을 '나의 권리'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옮긴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고대 히브리인들이 수천 년간 지켜온 단어 '쩨다카(צְדָקָה, Tzedakah)'는 우리가 아는 정의의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들에게 정의는 법정의 판결문이 아니라, 굶주린 이웃의 식탁 위에 놓인 빵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뜨겁고도 혁명적인 정의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헬레니즘의 '디케'와 히브리즘의 '쩨다카'
서구 문명의 정의 관념은 크게 두 줄기로 나뉜다. 하나는 그리스적 전통인 헬라어 '디케(Δίκη, 정의)'로, 이는 흔히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으로 상징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는 배분적 정의다. 반면 다른 한 줄기는 히브리적 전통인 '쩨다카'다. 이 단어는 '올바름' 혹은 '의로움'을 뜻하는 어근 '쩨덱(צֶדֶק, Tzedek)'에서 유래했다. 흥미로운 점은 성서 히브리어에서 '정의'와 '자선'을 구분하는 별도의 단어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자선(Charity)'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에 뿌리를 두며, 이는 주는 사람의 선한 마음이나 호의에 기초한다. 즉, 주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지만 주면 칭찬받는 선택 사항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쩨다카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내 주머니에서 떼어 주는 시혜가 아니라, 원래 그들의 것이어야 할 몫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행위다. 고대 이스라엘의 농경 문화에서는 밭 모퉁이를 베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주인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땅의 소출 중 일부는 본래 공동체의 것이라는 '쩨다카'의 원리를 실천한 것이다. 정의가 곧 나눔이고, 나눔이 곧 정의인 세계관이다.

능력주의의 독과 '쩨다카'의 경제학
현대 사회의 공정 담론은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지적했듯 '능력주의의 폭거'에 갇혀 있다. 내가 잘나서 성공했으니 내 몫을 챙기는 것이 정의라는 논리다. 하지만 사회학적 데이터는 인간의 성공이 개인의 역량보다는 부모의 경제력, 태어난 환경, 시대적 운에 더 크게 좌우됨을 보여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헤크먼’(James Joseph Heckman)은 유아기 환경이 개인의 평생 소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를 통해, 진정한 공정은 사후적 보상이 아니라 출발선의 불평등을 메우는 '쩨다카'적 개입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개혁교회 전통 또한 인간의 모든 소유를 '청지기적 직분'으로 본다. 내 손에 쥐어진 재물과 재능이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잠시 맡겨진 것이라는 통찰이다. 이는 현대의 '사회적 책임(CSR)'이나 'ESG 경영'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기업의 본질적 정의라는 인식이다. '쩨다카'는 이처럼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사회 경제적 구조를 지탱하는 가장 지적인 투자이자 상생의 시나리오로 작동한다.
관계의 복원이 진정한 정의다
왜 '쩨다카'가 차가운 공정보다 강력한가? 그것은 쩨다카가 '관계의 복원'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맥락에서 정의는 법적 절차의 완성이 아니라, 깨진 관계를 바로잡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를 유대 철학에서는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Tikkun Olam)', 즉 '세상을 수리하는 것'이라 부른다. 세상은 본래 온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곳곳이 깨지고 일그러졌다. 이때 우리가 행하는 쩨다카 한 조각은 그 깨진 틈을 메우는 수리 작업이 된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공정은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선사한다. 하지만 쩨다카는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대등한 관계로 묶는다. 주는 자는 자신이 '채무'를 갚는 것이기에 겸손해지고, 받는 자는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이기에 당당해진다. 데이터가 증명하듯,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일수록 구성원의 행복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반면 부의 재분배가 쩨다카적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는 신뢰 자본이 축적되어 위기 상황에서 놀라운 회복력을 발휘한다. 결국 정의로운 행동은 남을 돕는 행위를 넘어, 내가 발 딛고 사는 공동체라는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가장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생존 전략이다.
세상을 수리하는 기쁨, 가장 고귀한 성공
책상 위, 혹은 마음속 저울을 들여다보라. 혹시 그 저울은 오로지 "내가 손해 보지 않았나?"만을 측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히브리어 '쩨다카'가 주는 서늘한 경고는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의 상당 부분이 누군가의 희생이나 결핍 위에 세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의란 내 주머니의 크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의 빈 접시를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아닐까?
미래 사회는 인공지능이 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계산적인 공정은 기계가 더 잘할지 모른다. 그러나 헐벗은 이웃을 보며 "이것은 본래 그의 몫이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것을 내미는 쩨다카의 영성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존엄이다. 당신이 오늘 실천하는 작은 나눔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다. 그것은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거대한 수리 작업의 시작이다. 이제 차가운 공정을 넘어, 세상을 따뜻하게 데우는 쩨다카의 정의로 당신의 삶을 채워보길 바란다. 세상을 수리하는 기쁨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성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