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② 보주성 귀속 문제와 고리의 국제적 위상
제목: 금나라도 인정한 고리 영토, 보주성은 어디인가
부제: 인종 4년 국서와 송나라 사신 통과 문제가 밝히는 고리의 강역
보주성 귀속을 둘러싼 외교 문서
고리사 권15, 인종 4년(1126) 12월 기사는 영토 귀속 문제를 참으로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금나라에 위위경인 김자류와 형부낭중인 유덕문을 보내 선유사 파견에 사례하였다.
표문에 이르기를, "고백숙이 와서 은밀히 황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보주성 지역을 고려에 귀속시키고 다시는 수복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표문은 계속된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고구리의 본토는 저 遼山(요산)을 중심으로 하였고,
평양의 옛터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는데, 여러 차례 바뀌어 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선조 때에 북쪽으로 요나라가 겸병하고 삼한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와서,
비록 수호를 강구하기는 하였지만 옛 땅은 돌려받지 못하였습니다."
"천명이 새롭게 내려 이미 성왕(금나라 왕)이 즉위하고,
군사가 정의를 위하여 일어남을 보고 성곽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선왕 때에 요나라의 변방 관리 사을하가 와서 황제의 칙지를 전달하며 이르기를,
'보주는 본래 고려의 땅이니 고려가 수복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보주를 수리하였다는 등의 조치 내용과 금나라에 감사하는 외교적 문구로 끝난다.
이 기사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
첫째, 고구리 영토는 요산을 중심으로 하였고 압록강과 평양이 근처에 있었다.
요산은 산서성 좌권에 오늘날도 현존하는 지명이다.
둘째, 앞의 조건으로 보아 보주는 현재 하북성의 보정으로 비정하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셋째, 요나라에게 삼한 땅의 북쪽까지 빼앗겼었으나, 요나라 말기이며 고리 예종 때 보주를 돌려주었고,
금나라도 고리의 영역이라고 인정하였다.
이 공문의 수수 뒤에도 몇 번의 국서에서 보주와 압록강의 고리 귀속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니,
보주가 국경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사신 통과 문제가 밝히는 고리의 영역
이 기사 뒤인 1128년, 몇 번에 걸쳐 송나라가 고리를 통과하여
금나라에 사신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탁하였고
고리는 거절하였다. 그 명분이 묘하다.
고리사 권15, 인종 6년(1128) 8월 기사를 보자.
"만약 사절들이 우리 땅을 경유하여 저 나라(금)로 간다면
저들도 반드시 우리 땅을 경유하여 귀국에 답례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어 특히 수전을 잘합니다.
그들은 답례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빌미로 회수와 절강의 형세를 상세히 알아내고
만일 전함을 준비하여 바다를 따라 남하해서 불의의 공격을 가한다면,
북쪽으로는 육전에 남쪽으로는 해전을 치르느라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같은 달 갑술일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저 금은 우리와는 압록강을 경계로 접하고 있고 이미 중국을 침범한 기세를 타고 있으며,
또 이웃나라를 해치려는 뜻을 품고 항상 남몰래 염탐하며 빈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회수와 절강이 고리 영토였는가
내용이 약간 애매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회수와 절강이 고리의 영토였음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산서성과 하북성 북쪽을 차지한 금나라와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간 송나라 사이에 고리가 존재하여야,
앞의 내용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만 연구가 부족하여 지명이라든지 다른 정황으로 뒷받침되지는 못하여 단정하지 못할 뿐이다.
그 후에는 강회가 고리의 영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기사를 발견할 수 없다.
즉 金史(금사) 지리지를 검토하면 현재의 하북성을 포함한 산동성과 하남성이
모두 금의 영역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리가 그 영역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의 반성(?)과 의의
김부식은 조선시대부터 사대주의로 경도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열전에서 볼 수 있듯이 묘청의 난을 평정하면서 보여준 행적은 매우 훌륭하였고,
대각국사 비문을 읽어 보면 균형된 감각을 갖춘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삼국사 권12를 보면 김부식은 동신성모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1110년, 1116년).
또 권43에는 김유신 열전 끝의 論(논)에서 을지문덕과 장보고를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민멸되어 들은 바를 전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권47에 삼국의 지명이 이름만 있고 위치가 미상한 곳, 즉 '위치를 모른다'고 기술한 내용은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앞의 동신성모를 모른다는 기록과 배치되는 결정적 기록 또한 존재한다.
1123년에 고리에 왔던 송나라 사신 이백여 명 가운데 ‘서긍’이 남긴 ‘선화봉사 고리도경’ 권17에는
東神祠(동신사)가 있어 주몽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낸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김부식이 1116년 송나라에서 귀국하여 동신사를 건축하고 유화부인을 모셨다고 이해하며,
고리가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계승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반성하였다고 생각해야 할까?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첫째, 고리는 기본적으로 고구리를 비롯한 삼국의 대륙 영역 대부분을 서서히 상실하였다.
둘째, 영토의 상실은 정부 차원에서 보유하던 역사적 사료의 상실을 동반할 수 있다.
셋째, 설화는 백성에 의하여 전승되는 것인바 대륙 백성의 이 땅(소위 반도)으로 이동이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넷째, 고리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역사와 문화 복원에 힘썼다.
올바른 역사를 탐구하라
위와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많은 역사 기록을 오늘날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지식층이 개인적으로 보유하였던 자료가 집대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또 많은 설화가 전승되고 있음은 약간의 백성들 이동과 함께
같은 조상을 갖는 백성들이 황해를 내해 삼아 같은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일 듯하다.
김부식의 사례와 달리, 이 땅의 모든 제도권을 장악한 사학자들은
우리의 과거 영역이 넓었다는 역사적 근거를 축소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지 의심된다.
오히려 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국 땅을 벗어난 지역에서 삼국사와 고리사에 나오는 지명을 발견하였음을 알리면, 검토조차 하지 않고 무시한다.
심지어 특정 지역에서 나온 유물은 과거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유물로 단정하거나,
명문이 담긴 유물을 외면한다면, 이미 학문이 아니다.
"영역이 넓다고, 역사가 길다고 좋은 것이냐?"는
비아냥을 중지하고 올바른 역사를 탐구하여야 한다.
오늘이라도 당장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식민사학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나라는 작고 약한 나라라느니, 천여 회나 침략만 받아왔다는 자기 모멸의 역사에 세뇌된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와 그에 따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키워왔던 종족이라고
자부심을 갖도록 옳은 역사를 발견하여 가르쳐 주기를 주문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