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입의 열매가 무너뜨린 인류의 낙원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15)

사소해 보이는 행위 뒤에 숨겨진 거대한 반역의 서사

현대 소비 사회의 욕망과 에덴의 열매가 마주하는 지점

결핍 없는 풍요 속에서 잉태된 탐욕의 역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5문

 

Q. 15. What was the sin whereby our first parents fell from the estate wherein they were created? A. The sin whereby our first parents fell from the estate wherein they were created, was their eating the forbidden fruit.
문 15. 우리의 첫 조상이 창조함을 받은 본래의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첫 조상이 창조함을 받은 본래의 상태에서 타락하게 된 죄는 그들이 금하신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AI 이미지 (제공: 미디어 울림)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환점은 대단히 거창한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니라, 동산 한가운데 놓인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아주 일상적인 동작에서 시작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5문은 인류가 본래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구체적인 죄의 내용을 '금하신 열매를 먹은 것'이라고 지목한다.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그깟 과일 한 알이 온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넣을 만큼 중대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법하다. 그러나 이 행위의 본질은 식욕의 충족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자신의 주권을 선언한 '우주적 반역'에 있다. 라틴어로는 이를 '말룸(Malum)'이라 부르는데, 이는 악(Evil)과 사과(Apple)라는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어 인류 타락의 상징적 사건을 함축한다.

 

금지된 열매를 먹는 행위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탈주'의 욕망을 대변한다. 에덴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었으나, 인간은 그 시스템의 설계자가 설정한 유일한 경계선을 넘으려 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금지된 것에 대한 매혹'이자, 타자에 의해 정의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오만한 주체성의 발현이다. 에덴의 모든 풍요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허용' 아래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단 하나의 '금지'에 집중했다. 이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 우리가 수만 가지의 소유물을 가지고도 단 하나 가지지 못한 것에 결핍을 느끼며 불행해하는 심리와 궤를 같이한다. 열매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인간은 신의 대리 통치자에서 신의 경쟁자로 자신의 포지션을 강제 변경하려 했던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사건은 '신뢰 자본'의 전면적인 파산이다. 모든 계약과 관계의 기초는 신뢰다.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로 인간과의 파트너십을 유지하려 하셨지만, 인간은 눈앞의 시각적 유혹(보암직함)과 감각적 쾌락(먹음직함), 그리고 지적 허영(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에 굴복하여 신뢰를 저버렸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내부 고발이나 기밀 유출이 조직의 존립을 흔들듯, 인간의 불순종은 우주적 질서에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켰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공짜 점심'을 바랐던 인간이 지불해야 했던 가장 비싼 비용이 바로 '죽음'과 '낙원 상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값싼 유혹에 넘어가 가장 소중한 가치를 팔아넘긴 인류 최초의 불합리한 거래였던 셈이다.

 

 

히브리어로 '먹다'를 뜻하는 '아칼(אָכַל)'은 단순히 섭취한다는 의미를 넘어 '소비하여 없애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비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 이기적인 소유욕이 존재의 본질을 압도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영적인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이 말한 '소유냐 존재냐'의 갈림길에서 인간은 존재를 버리고 소유를 선택했다. 그 열매가 주는 가상의 지혜를 소유하려다, 참된 생명을 주는 신과의 연합이라는 존재 방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선택의 대가는 혹독했다. 자연과의 조화는 깨졌고, 타인과의 관계는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며, 자기 자신과는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제15문이 강조하는 것은 죄의 '형식'이 아니라 '본질'이다. 열매 그 자체가 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열매에 담긴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긴 마음이 독이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수많은 '에덴의 열매' 앞에 서 있다. 법의 테두리를 살짝 벗어나 얻는 작은 이익,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며 누리는 짧은 즐거움, 그리고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은 모두 아담이 베어 물었던 그 열매의 변주곡들이다. 타락의 역사는 과거의 신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에 살아 숨 쉰다. 소요리문답은 이 뼈아픈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즉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순종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흔히 선악과를 두고 "왜 그런 나무를 만들어서 인간을 시험에 들게 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만 증명된다. 선악과는 인간을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인간이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아담의 실패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깨닫게 한다. 이제 우리는 소유하려는 욕망을 넘어, 순종을 통해 존재를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허동보 목사 | 수현교회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외

 

 

 

작성 2026.02.08 20:08 수정 2026.02.0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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