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른다. 누군가에게 덕후는 단순히 소비하는 자이지만, 김한재에게 덕후란 “좋아하는 것에 진심인 나머지 끝까지 쫓아가고, 연구하고, 결국 창작으로 되돌려놓는 엔진”을 가진 사람이다.
The Imaginary Pocus 아티스트 아카이브, 그 아홉 번째 주인공은 스스로를 “도전을 사랑한 아티스트, 만화 덕후”라고 소개하는 김한재 작가다. 현재 강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과 교수이자 AI와 만화·웹툰 융합 연구가로 강단과 현장을 누비는 그녀. 이불 속에서 몰래 손전등을 켜고 책을 읽던 문학 소녀에서, 자신의 키만 한 제도용 T자를 짊어지고 다니던 아날로그 세대를 지나 생성형 AI라는 최첨단 파도까지 거침없이 갈아타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그녀. ‘어쩌다 여교수’가 된 그녀의 다이내믹한 예술 항해기를 들어보았다.

이불 속 문학 소녀, 만화라는 ‘신세계’를 열다
김한재의 시작은 이불 속 작은 손전등 불빛 아래였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 창작 동화를 쓰며 상상을 키우던 소녀는 초등학교 2학년, 우연히 들어선 구청 앞 만화방에서 인생을 뒤흔든 ‘신세계’를 마주한다. “그동안 빠져지내던 동화나 소설과 달리 살아움직이는 장면을 접하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일단 그림이 너무 예뻤고, 이야기는 훨씬 빠르게 심장으로 들어와 요동치게 만들었다”는 강렬한 설렘에 매료된 그녀는 어느새 만화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기게 되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20원, 50원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귀여운 ‘최초의 커미션’ 활동을 시작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중학교 시절 찾아왔다.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핍을 느끼던 시기, 쉬는 시간에 끄적인 만화를 보고 한 친구가 펑펑 눈물을 쏟은 것이다. “말주변이 없어도 만화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구나.” 그 순간의 전율은 그녀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후 그녀는 만화 아카데미 0기생을 거쳐 만화가로 데뷔했고,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무작정 미국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로 유학을 떠나며 본격적인 예술 항해를 시작했다.
‘도전’이라는 이름의 렌즈로 본 세상
그녀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도전’이다. 하지만 김한재에게 도전은 무모한 베팅이 아니라, 낯선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태도에 가깝다. 인터넷도 없던 20대 초반, 종로에서 미국대학관련 자료를 뒤져가며 배편으로 서신을 주고받고 홀로 유학을 준비했던 경험은 “부딪혀서 못 할 것은 없다”는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기다리는 대신 찾아가는 길을 택했다. 남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각종 협회와 학회의 문을 직접 두드리며 “저는 이런 걸 하고 싶은데 여기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곳인가요?”라고 묻던 당찬 패기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과학창의재단 등 다양한 기관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지금, 만화> 발간위원, 칼럼니스트, 대학 교수 등 수많은 직함을 얻게 되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두드리면 열리는 수많은 기회의 문이었다.
작품 세계: 달콤한 외형 속에 감춰진 서늘한 균열
김한재의 작품 세계는 “예쁘고 귀여운데, 어딘가 위험한 세계”로 요약된다. 그녀는 큰 눈과 부드러운 형태의 귀여운 비주얼을 사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잔혹동화 같은 서늘한 균열을 심어 놓는다. 이는 독자를 귀여움으로 무장해제시킨 뒤, 방심한 틈을 타 세계의 서늘한 민낯을 마주하게 만드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반전 미학이다.
그녀의 작품 세계가 잘 드러나는 인생작 세 편을 꼽았다. 동화소녀/소년 시리즈인데, 동화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들이 대부분으로 등장한다. 원작과는 달리, 사실은 이런 상처가 있었을지도 몰라, 라는 호기심으로 동질감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하였다.
첫 번째는 <Fish sushi Girl (2014)>이다. 회를 좋아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인어의 이야기로, 사랑해서는 안 될 대상을 향한 자기희생과 아픔을 담담한 펜슬 드로잉 느낌으로 표현했다. 수수한 그림체 뒤에 숨겨진 ‘사랑하는 이가 나를 먹는 존재’라는 잔혹한 슬픔이 인상적이다.


두 번째 <cupid (2014)>는 큐피트와 다프네 중 하나이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아폴론의 구애를 물리치고 도망쳐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 그리고 그처럼 장난처럼 사랑을 여겨왔던 큐피트는 자신의 화살로 인해 프쉬케와 가슴 아픈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랑을 가볍게 여기며 장난을 치던 큐피드가, 결국 그 장난으로 자신의 심장에 상처를 입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면 무슨 일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안이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그 태도가 결국 스스로를 가장 깊게 다치게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큐피드의 눈동자는 여전히 천진난만하지만, 가슴을 관통한 화살은 그 이면에 숨겨진 찢어질 듯한 고통을 드러낸다. 마음의 상처가 단지 감정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감되는 통증처럼 현실화되는 장면이며, 사랑을 함부로 다룬 대가가 얼마나 잔혹하게 되돌아오는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세 번째 <Coz of U (2015)>는 상처로 인해 감정이 한계까지 차올라, 마치 온몸이 피눈물로 녹아내리는 듯한 상태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캐릭터의 외형은 여전히 귀여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귀여움은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나 아파”라는 신호인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가슴을 쥐어짜듯 견뎌야 하는 순간—그 억눌린 통증과 흔들림을 시각적으로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귀여움으로 끌어들이고, 잔혹함으로 흔들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그녀의 예술적 문법을 명확히 보여준다.
도구의 진화와 실험: ‘어쩌다 여교수’의 멈추지 않는 확장
김한재는 도구에 얽매이지 않는다. 뉴욕 유학 시절 자신의 키만한 T자를 들고 다니며 투시도를 배웠던 아날로그 세대인 그녀는, 디지털 툴의 등장을 거쳐 이제는 AI와 씨름하고 있다. 만화가를 꿈꾸다 공부를 했더니 교수가 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상 강의를 하다 보니 유튜버가 된 자신의 기록을 그녀는 ‘어쩌다 여교수’라고 부른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이 유쾌한 부캐(부캐릭터)는 이제 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는 실험적인 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그녀는 2025년 홍대와 EBS 스페이스홀에서 진행된 ‘Re:Vibe’ 전시는 국내 최초로 NFC 굿즈와 AI 음악을 결합하여 기술이 예술적 경험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증명했다. 또한, AI 작가들과 함께한 유기묘 입양 프로젝트 ‘Buy Art, Save a Cat’은 그녀가 부캐를 넘어, 사회적 가치와 기술을 연결하는 현역 아티스트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동시대와 호흡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간과 게릴라 이벤트: 현실 작가들을 위한 실전 가이드
이런 치열한 고민과 노하우는 최근 출간된 신간 <나노바나나로 AI툰 제작하기>(비엘북스)에 고스란히 담겼다. 전작 (생성형AI로 웹툰만화제작하기(성안당))가 AI 웹툰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이번 책은 실전과 ‘마감’을 위한 냉정한 가이드북이다.
특히 그녀가 직접 제작하고 모아온 ‘제작 템플릿’(만화 원고 용지, 기획 시트 등)을 초회 한정 부록으로 제공하여, 독자들이 책을 덮자마자 곧바로 “진짜 만화가”의 기분을 느끼며 창작에 뛰어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해당 신간은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그녀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벤트들이다. 우선 ‘독자 10명만 모이면 찾아가는 1시간 무료 특강’은 현재 유효하다. 서울 근교(대중교통 1시간 거리)라면 어디든 달려가 핵심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이 공약은 벌써부터 알음알음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부끄러움 많은 작가들을 위한 시크릿 스터디’도 계획 중이다. 이는 대형 강의가 아니라, AI 도입을 고민하는 기성 작가들을 위해 작업실 근처 카페 등에서 비밀스럽게(?) 열리는 소규모 모임이다. "이 컷은 AI를 쓰고, 저 컷은 직접 그리는 게 낫다"는 등 실전형 컨설팅을 목표로 하는 이 스터디는 그녀의 SNS(페이스북)를 통해 예고 없이 '게릴라성'으로 공지될 예정이다. 그녀의 페이스북 알림 설정을 켜두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난 셈이다.
AI 시대,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
그녀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속도는 빨라지지만, 그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방향’이라고 강조한다. 도구는 시간을 압축해 줄 뿐, 그 힘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는 오롯이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흥하고 망하는 갈림길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상상력을 다루는 태도와 판단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기술은 변해도 예술과 이야기는 늘 그렇게 피어나고, 사라지고, 또 남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을 시작하게 하는 첫 힘은 여전히, 사람의 상상입니다.”
기술 만능주의 시대, 도구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사람의 태도’로 승부하겠다는 아티스트 김한재만의 명쾌한 해법이다.
덕질하는 귀여운 할머니를 꿈꾸며
인터뷰 말미, 그녀는 미래의 거창한 계획 대신 “덕질을 하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둔 작은 공방을 열고, 그곳에서 사람들과 취향을 나누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삶. 그것이 ‘도전을 사랑한 만화덕후 아티스트’ 김한재가 그리는 ‘도전’의 최종장이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방황하는 예비 창작자들에게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조급해하지 말고, 혼자 끙끙대기보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으라고 말이다.
“겁나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한 번 더 도전. 콜?”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세상이라는 문 앞에서 망설이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아티스트 김한재만의 유쾌하고도 따뜻한 제안이다

[아티스트 소개: 김한재]
미국 뉴욕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만화를 전공하고 세종대 석사를 거쳐 상명대에서 감성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어 생성형 AI까지 섭렵하며 스스로를 ‘도전을 사랑하는 만화 덕후’라 정의한다. ‘어쩌다 여교수’라는 부캐릭터를 통해 유튜브와 강단을 오가며,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지금, 만화> 발간위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국내 최초 NFC 아트 전시 ‘Re:Vibe’, 유기묘 후원 프로젝트 ‘Buy Art, Save a Cat’와 2026년 2월 현재 신간 《나노바나나로 AI툰 제작하기》등을 통해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속도보다는 방향, 기술보다는 태도”라는 철학 아래, 동료 작가들의 현실적인 마감을 돕고 평생 즐겁게 덕질하는 할머니가 되기를 꿈꾸며 창작의 길을 넓히고 있다. 페이스북 @Hanjae Kim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