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한 산을 향해 세 무리의 순례자가 마음으로 오른다. 유대인은 신년 ‘로쉬 하샤나’에 숫양의 뿔 나팔, 곧 ‘쇼파르’를 불며 그 산을 기억한다. 무슬림은 희생제, ‘이드 알 아드하’에 양을 잡으며 그 산을 되새긴다. 그리스도인은 수난의 금요일마다 한 어린 양을 바라보며 그 산을 떠올린다. 같은 산, 같은 숫양, 그러나 세 갈래로 갈라지는 메아리다. 그 산의 이름은 ‘모리아’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해 제단에 올렸던 바로 그 자리다. 한 사건에서 어떻게 세 개의 구원이 갈라져 나왔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종교 비교가 아니라, 인류가 죄와 구원을 이해해 온 세 갈림길의 분기점을 가리킨다.
먼저, 셋이 나란히 딛고 선 땅을 확인해야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우러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셋 모두 ‘대체 제물’을 인정한다. 히브리 성경은 숫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려졌다고 명시한다(창 22:13). 꾸란 역시 알라가 그 아들을 "위대한 희생 제물로 대신하게 하였노라"라고 기록한다(꾸란 37:107). 그러므로 '아들을 대신한 숫양'은 세 신앙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니다. 분기점은 그 숫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있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세 신앙은 전혀 다른 그림을 읽어 낸다.
유대교가 읽어 내는 것은 '아케다', 곧, 결박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을 향한 최고의 시험이며, 제단 위의 이삭은 자원하는 순교자의 표상이다. 유대 전승은 그 숫양의 뿔에서 주로 숫양의 뿔로 만든 고대 악기, ‘쇼파르’가 나왔다고 본다. 그래서 신년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신실함을 '기억해 달라'는 호소가 된다. 로쉬 하샤나의 '기억(지크로노트)' 기도는 이렇게 간구한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던 그 일을 기억하시어, 그 자손을 향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이것이 이른바 '아케다의 공로'다. 더 나아가 역대하 3장 1절은 모리아를 훗날 성전이 세워진 산으로 지목한다.
이삭이 묶였던 자리가 곧 이스라엘 예배의 심장이 된 셈이다. 다만 유대교에서 죄의 용서는 그 숫양의 피가 단번에 이룬 것이 아니다. 회개(테슈바)와 기도, 자선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그 결박을 '기억'하시는 자비를 통해 주어진다. 숫양은 이삭을 살리고, 하나의 거룩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슬람이 읽어 내는 것은 '타슬림', 곧 완전한 복종이다. 꾸란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먼저 자기 뜻을 밝힌다. "명령받으신 대로 하소서. 알라가 원하신다면 저를 인내하는 자로 보실 것입니다"(꾸란 37:102). 이 자발적 순복이야말로 이슬람이 보는 그 사건의 정수다. 그 대가로 주어진 숫양은 '몸값(피드야)'이며, 순종하는 종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어야 한다.
꾸란 본문 37장은 정작 그 아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스마엘이라는 식별은 후대 이슬람 전통의 다수설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이슬람을 관통하는 한 원칙이다. "누구도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 없다"(꾸란 6:164). 숫양은 한 아들의 목숨을 건져 낼 수 있어도, 다른 이의 죄까지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그래서 ‘이드 알 아드하’는 대속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알라께 온전히 자기를 바치겠다는 결단을 새로 다지는 의식이다. 숫양은 아들을 살리고, 복종의 본보기로 남는다.
여기서 두 신앙이 한자리에서 만난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모두 숫양의 대체를 인정하면서도,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갚는다'라는 논리 앞에서는 나란히 멈춰 선다. 유대교는 회개의 길로, 이슬람은 개인 책임의 원칙으로 그 멈춤을 설명한다. 두 거대한 신앙이 대속(代贖) 앞에서 보이는 이 공통된 망설임은 비 기독교인들한테 자주 듣는 한 질문으로 응축된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내 죄를 대신 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이 물음은 절대 가볍지 않다. 오히려 절실하고 진지한 물음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물음 위에서, 세 번째 길이 갈라져 나온다.
기독교가 읽어 내는 건 '예표', 곧 장차 올 실체의 그림자다. 아브라함은 산에 오르기 전 이렇게 말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그리고 그 자리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라 불렀다(창 22:14). 눈여겨볼 것은 그 시제다. 준비'하셨다'가 아니라 준비'하시리라'다. 숫양은 그 순간을 넘어 더 먼 곳을 가리키는 미래의 약속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례 요한은 한 사람을 가리키며 그 약속의 실체를 선포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모리아의 숫양은 그림자였고, 그 그림자가 가리킨 본체는 그리스도였다. 흥미롭게도 유대 전승 한구석에는 이삭이 실제로 드려졌다가 살아났다는 놀라운 소수 견해마저 있었으니,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도 살리실 줄로" 믿었다고 증언한다(히 11:19). 모리아에는 이미 부활의 첫 속삭임이 깃들어 있었던 셈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깊은 구조적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최종 계시를 어디에 두느냐다. 이슬람에서 그 계시는 '책'이다. 꾸란은 알라의 영원한 말씀이 문자로 하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해리 울프슨은 이를 '인리브레이션(Inlibration)', 곧 '말씀이 책이 됨'이라 불렀다.
반면 기독교에서 최종 계시는 '인격'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려 책을 부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셨다. 말씀이 책이 된 신앙과 말씀이 사람이 된 신앙. 이 차이가 구원의 방향마저 바꾼다. 한쪽은 인간이 계시를 따라 위로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신다.
이제 유비(類比)의 자리에 설 때다. 유비란 공통된 관계에서 새로운 결론을 길어 올리는 사유다. 세 신앙은 '숫양 대(對) 아들'이라는 동일한 관계를 공유한다. 그 관계가 어디서 완성되는가만 다를 뿐이다. 유대교에서는 '기억된 공로'로, 이슬람에서는 '갱신된 복종'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더 큰 어린 양, 곧 그리스도로 완성된다.
여기서 꾸란이 스스로 던진 한 단어가 묘한 울림을 남긴다.
꾸란은 그 숫양을 '위대한' 희생이라 불렀다(37:107).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에 견주어 위대한가. 숫양 한 마리가 한 아들을 건졌다면,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을 건질 '위대한 희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체의 논리는 일단 받아들여지는 순간, 단번에 충분한 최종의 대체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슬림 친구의 물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어떻게 남이 내 죄를 대신 지는가." 만일 그 대신하는 자가 억지로 끌려온 약자라면, 그 물음은 옳다. 그것은 불공평이다.
그러나 만일 재판장이 친히 피고석으로 내려와 선다면 어떠한가. 준비하시는 분이 곧 준비된 제물이 되신다면 어떠한가. 그것은 더 이상 불의가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질 책 한 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시려 친히 오셨다. 개인 책임의 원칙은 옳다. 다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책임의 주인이 친히 그 자리에 서신 것이 복음이다.
나는 오랜 세월 무슬림 이웃들 사이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기도와 절제, 알라를 향한 그 진실한 갈망 앞에서 나는 자주 옷깃을 여몄다. 그러니 이 글은 누구를 이기려는 글이 아니다. 다만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내가 만난 한 산을 가리켜 보이는 손짓일 뿐이다. 오늘도 모리아에는 세 무리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 쇼파르의 울음, 내려놓인 칼, 그리고 나를 대신해 묶이신 한 어린 양. 해 질 녘 그 산에 서면, 준비'하시리라'던 그 오랜 약속이 어느새 준비'되었다'로 바뀌어 들린다. 나는 그 어린 양 앞에서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가만히 묻는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같은 물음을 건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