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나니 갑자기 나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직장에서 은퇴한 58세의 김정수 씨는 최근 다시 ‘일자리’를 찾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어디엔가 속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나이 들어도 계속 일하고 싶은 욕구’는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을 ‘직업’을 통해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속에서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존재의 이유’로 작용한다. 특히 50~60대 이후에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이 기사에서는 중장년층이 커리어를 지속하고자 하는 심리적 이유를 소속감, 워라밸, 자기효능감의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 본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동료이고 싶다” – 소속감이 주는 정체성 유지
일은 곧 '사회적 연결'이다. 직장이란 공간은 단순한 업무 처리의 장소를 넘어, 사람 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개인이 조직 내에서 역할과 책임을 맡으며 정체성을 구축하는 공간이다. 중장년층에게 직장은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울타리다. 은퇴 후 하루아침에 모든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명함 한 장 없는 삶을 마주하며 많은 이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은퇴 후 1년 이내에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평균 47% 증가했다. 특히 남성의 경우 ‘소속감 상실’에 따른 우울감이 여성보다 1.6배 더 높게 나타났다.
일이 주는 소속감은 단지 감정적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욕구를 지닌다. 이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심리 중 하나로, 나이와 무관하다. 따라서 직장을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소속’이라는 틀을 찾아 나서는 중장년들의 행보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워라밸이 곧 삶의 균형: 일과 여가를 함께 누리는 중장년의 선택
중장년층의 일에 대한 접근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인생 2막’은 단지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균형을 되찾는 시도다. 과거 세대는 ‘일은 고통이자 의무’였지만, 이제는 ‘일을 통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50대 이상의 재취업 희망자 중 62%가 ‘유연근무제’가 갖춰진 근무환경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도 여행과 가족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워라밸 중심의 구조가 중장년의 새로운 기준이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실제 고용시장에도 반영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 민간기업들은 ‘중장년 대상 시간제 근무’나 ‘전문직 임시직’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단순 반복노동이 아닌, 경력과 전문성을 활용하는 직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일하는 노년’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며 어떻게 사는가이다.
자기효능감, 일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자존감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좋다.”
전직 회계사였던 64세 박현숙 씨는 퇴직 후 소규모 지역 회계 봉사를 시작하며 오히려 삶이 더 활기차졌다고 말한다. 그는 “돈을 떠나, 나의 경험과 지식이 아직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고 했다. 이처럼 자기효능감은 단지 업무 능력을 넘어서,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오랜 경력을 쌓아온 중장년에게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감각은 자존감 회복에 결정적이다. 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퇴직 후 자기효능감이 유지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삶의 만족도가 1.8배 높았다. 반면 ‘할 일이 없고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사람들의 우울 증세는 평균보다 2.3배 높게 나타났다. 일을 통해 얻는 자기효능감은 단지 ‘바쁘게 사는 삶’이 아니다. 삶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경험이며, 존재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단순한 생계 그 이상: 일은 곧 사회와의 연결고리
많은 사람들은 중장년층이 일하는 이유를 ‘경제적 필요’로 단정 짓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이상의 동기가 있다. 고령층 일자리 정책 연구에서, 중장년층 구직자 중 57%는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해’ 일자리를 원한다고 답했다. 이는 ‘생활비 마련’(42%)보다 높은 수치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일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회의에 임하며 자신이 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관계적 경험은 일상 속 활력소가 되며, 고립감을 예방하고 정서적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일은 삶의 중심에 놓인 ‘사회 참여의 통로’다.
나이 든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장년층은 ‘일을 계속하고 싶다’. 단지 방식과 조건이 바뀔 뿐이다. 소속감, 워라밸, 자기효능감. 이 세 가지는 단순한 직업 유지 이유가 아니다. 중장년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다. 일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일은 곧 존재의 확인, 사회와의 연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이제 '퇴직'이 아닌, '전환'을 말해야 할 때다. 일의 방식이 바뀌어야지, 일의 의미까지 사라져선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