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 가라테도의 역사는 류큐 왕국의 고유 무술인 '티(手)'에서 시작된다. 류큐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교역의 요충지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와 함께 중국 무술이 유입되었다. 1392년 명나라로부터 온 36성(姓)의 귀화인들이 나하의 구메 마을에 정착하며, 그들이 지닌 뛰어난 기술과 더불어 발전된 권법을 전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 류큐인들은 호신을 위해 맨손 격투술인 '티'를 수련하게 된다.
1609년 사츠마의 침공 이후, 류큐는 무기 소지가 금지되거나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맨손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티'는 더욱 실전적인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 무술의 영향이 심화되면서, '티'는 점차 '당수(唐手, 토우디)'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唐)'은 중국을 의미하며, 이는 중국 권법과의 융합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1609년 사츠마 번의 침략 이후 류큐에서는 무기 사용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맨손으로 자신을 지켜야 했고, ‘티’는 더욱 실전적인 호신술로 변모했다. 중국 무술의 색채가 짙어지면서 ‘당수(唐手, 토우디)’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당(唐)’은 중국을 의미하며 중국 권법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사쿠가와 칸가(佐久川寛賀)는 ‘당수 사쿠가와’라 불리며 무술 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슈리 지역의 ‘슈리테’, 나하 지역의 ‘나하테’, 토마리 지역의 ‘토마리테’가 각각 형성되었는데, 이는 중국 권법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지역적 특색이 더해져 독자적인 유파로 발전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1868-1912)로 접어들면서 가라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이토스 안코(糸洲安恒)는 교육적 가치를 강조하며 기존 카타(型)를 재정비하고, 초심자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평안(平安, 핀안)과 나이환치(ナイファンチ) 같은 보급형 카타를 창안했다. 이를 통해 가라테는 학교 체육 교육에 도입되었고, 대중적인 무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08년 교토의 무덕전에서 ‘당수’가 처음 소개된 이후, 1922년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이 일본 본토에 가라테를 전파하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1936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공수좌담회’를 계기로, 명칭은 ‘당수(唐手)’에서 ‘공수(空手)’로 바뀌었다. 이는 ‘중국의 손’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비어 있는 손’, 즉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무술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정체성을 반영한 변화였다.
이 시기 쇼토칸류, 고류, 와도류, 시토류 등 현대 가라테의 주요 유파가 정립되었다. 이들은 각각의 해석과 수련법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모두 가라테라는 큰 틀 속에서 발전해왔다.
궁극적으로는 인격 완성을 목표로 하는 ‘무도(武道)’로 자리매김했다. “가라테에 선제공격은 없다(空手に先手なし)”라는 격언은 모든 형(型-품새)이 방어로 시작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는 싸움을 지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가라테의 정신적 지주이자, 무술을 통한 자기 수양의 철학을 함축한다.
더불어 ‘친쿠치(チンクチ)’와 ‘가마쿠(ガマク)’와 같은 신체 조작 원리는 단순한 근육의 힘이 아니라, 몸 전체를 유기적으로 활용해 폭발적인 힘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숙련된 힘’을 강조한다. 이러한 원리와 철학은 류큐 왕국의 맨손 호신술을 오늘날 전 세계인이 수련하는 무도로 발전시킨 근간이 되었다.
가라테의 역사는 류큐 왕국의 맨손 무술에서 시작해 중국 권법과의 융합, 무기 금지령 속의 실전적 발전, 일본 본토 전파, 그리고 세계화라는 여정을 거쳐왔다. 단순히 싸움의 기술을 넘어, 인간의 마음과 몸을 수련하는 무도적 가치가 강조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라테는 류큐 왕국의 ‘티(手)’에서 시작해 ‘당수’를 거쳐 오늘날 ‘공수(空手)’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전해졌다. 그 본질은 언제나 ‘무기 없는 손’이었으며, 싸움이 아닌 평화와 인격 완성의 길을 추구해왔다. 오키나와에서 비롯된 이 맨손 무술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성장해, 오늘날 수천만 수련자가 함께하는 글로벌 무도로 발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