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놀드 토인비를 읽는다는 것
우리는 종종 '역사'라는 단어 앞에서 주눅이 든다.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기록이며, 거대한 연표와 우리가 외워야 할 사건들의 무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 그 무덤 속에서 생명의 심장 박동을 듣고야 만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놀드 J. 토인비(Arnold J. Toynbee)이다.
그의 필생의 역작, 12권에 달하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인류라는 거대한 숲을 헤매며 평생에 걸쳐 그려낸 '영혼의 지도'이다.
이 책은 한 학자의 학문적 성과로만 읽어내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악의 파국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끌어안고 살았던 한 영혼의 처절한 고백이다.
21개의 문명, 21개의 거울
토인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그는 21개의 거대한 문명(이집트, 수메르, 헬라, 마야, 안데스...)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의 탄생과 성장, 쇠퇴와 몰락이라는 장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그는 이 거대한 교향곡 속에서 단 하나의 리듬, 하나의 법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이라는 운명의 심장 박동이다.
그의 주장은 명쾌하다. 문명은 안락함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문명은 혹독한 '도전'에 맞서 싸우는 '응전' 속에서 탄생한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의 범람이라는 가혹한 도전에 '관개 수로'라는 창조적 응전으로 탄생했다.
이것은 얼마나 통렬한 통찰인가. 안락함은 문명을 잠들게 하고, 고난은 문명을 깨운다.
토인비는 이 도전을 '내부적 도전'(사회 분열, 정치 부패)과 '외부적 도전'(전쟁, 자연재해)으로 나눈다. 문명은 이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할 때 성장하고, 그 응전에 '실패'할 때 쇠퇴하여 몰락의 길을 걷는다.
역사는 내 삶의 거울이다
이 책이 위대한 이유는, 이 거대한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 5천 년 전 수메르 문명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도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토인비가 세워둔 21개의 거울 앞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삶은 지금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인가, 관계의 단절인가, 아니면 내면의 영적 공허함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고 있는가? 그저 주저앉아 불평하며 '운명론'에 우리를 맡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 도전을 딛고 일어설 '창조적 소수'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토인비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역사는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패턴을 읽어내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라고. 한 문명의 쇠퇴는, 그 문명을 이끌던 '창조적 소수'가 더 이상 새로운 응전을 내놓지 못하고 '지배적 소수'로 전락하여 과거의 성공에만 안주할 때 시작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경고인가. 우리의 삶은, 우리 사회는 지금 '창조적 소수'인가, 아니면 '지배적 소수'인가?
한 인간이 그려낸 장엄한 지도
물론, 한 인간이 어찌 신의 섭리 전체를 지도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토인비의 장대한 지도는 수많은 비판을 받는다. "문명의 개념이 모호하다", "21개라는 패턴이 너무 억지스럽다", "모든 문명에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그의 지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비판마저도 이 책의 위대함의 일부라고 말하고 싶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감히 '역사의 법칙'이라는 신대륙을 찾아내려 했던 한 인간의 고뇌와 야망, 그 치열함이 우리에게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그는 불완전했기에 위대하다. 그는 감히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기에,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응전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토인비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거대하고 복잡한 '도전'의 시대에 서 있다. 인공지능의 도전, 기후 위기의 도전, 이념적 양극화의 도전.
『역사의 연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12권의 책을 정복하는 지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공동체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지금 어떤 도전에 직면했으며, 우리는 무엇으로 응전할 것인가?"라는 가장 실존적인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행위이다.
토인비는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다만, 역사의 거대한 거울을 닦아 우리 앞에 세워줄 뿐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스러져간 문명들의 잔해를 보며, 동시에 내일의 우리를 본다. 이 책은 그래서 고전이며,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예언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