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세종미술관에서 열리는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의 포스터에 사용된 호아킨 소로야의 <라 그라하의 마리아>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의 모습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흰색은 단순한 색채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흰색은 청결, 순수, 처녀성과 연관되지만, 동아시아 문화에서 ‘백(白)’은 그보다 훨씬 깊고 복합적인 상징을 가진다.
백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비움’과 ‘여백’,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잠재성을 내포한다. 글자가 적히기 전의 종이, 소리가 나기 전의 숨결처럼, 백은 무언가가 태어날 가능성을 품은 공(空)에 가깝다. 이는 서구의 순수·청결 상징과는 구별되는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색채철학이다.
오행에서 백색은 ‘금(金)’에 해당하며, 이는 가을과 수확, 정리와 결단을 상징한다. 봄과 여름의 성장과 피어남 이후 가을은 모든 생명이 정리되고 완성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백색은 단순히 깨끗함을 넘어서 끝맺음과 완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색으로 이해된다.
또한 동아시아 전통에서 백색은 죽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상복은 검정이 아닌 흰색으로, 이는 죽음을 끝이 아닌 ‘공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보는 철학에서 비롯된다. 죽음은 비움과 환원,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며, 백색은 슬픔과 정화, 그리고 변화의 상징이다.
한국 미술에서 백색은 여백과 공간의 미학을 대표한다. 분청사기의 은은한 회백색, 한지의 따뜻한 백색, 조선백자의 절제된 흰빛 등은 모두 ‘가득 차기 위해 먼저 비우는’ 여백의 철학을 담고 있다. 백색은 조용하지만 넓고 깊은 가능성을 품은 색으로, 한국적 미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발효 문화에서도 백색은 본질적 의미를 지닌다. 막걸리의 순백, 갓 지은 쌀밥의 흰색, 누룩 제조 초기의 연백색은 모두 생명의 시작과 준비 상태를 나타낸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색은 변하지만, 그 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유연성과 잠재력은 백색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 백색은 마음의 상태와도 연결된다. 차분함과 여백, 집중을 상징하며 명상 공간과 사유의 방에서 주로 사용된다. 백색은 마음의 잡음을 제거하고 본질을 드러내는 색이다.
결국 백색은 사라짐이 아니라 ‘시작하는 자리’다. 마침표이면서도 동시에 문장 앞의 빈 공간인 백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가장 큰 그릇으로서, 끝과 시작, 정리와 가능성을 동시에 품는다. 이번 전시회에 등장한 흰 드레스의 마리아가 지닌 의미도 이처럼 다층적이며 깊은 문화적 상징성을 반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