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를 인간으로 본 첫 철학자, 방정환
— 한국 아동문학의 사상적 뿌리를 다시 묻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 인간은 존재의 서열 속에 갇혀 있었다.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구분이 일상의 위계로 작동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대에 ‘어린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나 ‘애’는 미성숙하고, 다스려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그런 시대에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단어를 창조했다.
이것은 단순한 신조어의 발명이 아니라, 존재의 인식 구조를 바꾸는 철학적 행위였다.
그에게 ‘어린이’란 단순한 연령적 개념이 아니라, 존엄한 인격을 지닌 존재,
즉 “작은 어른(little adult)”이 아닌, 독립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었다.
그의 사유는 단순히 감상적인 인도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치와 언어의 관계를 통찰한 현상학적 인간학(phenomenological anthropology)이었다.
언어는 인식의 틀이고, 인식은 사회적 구조를 결정한다.
따라서 ‘어린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곧 존재의 새 질서의 선포였다.
그는 ‘아이’를 불러내는 새로운 말 속에서,
“모든 존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간학적 신념을 실천했다.
방정환이 말한 ‘어린이’는 철학적 혁명 그 자체였다.
방정환의 언어철학은 ‘존재는 말 속에서 드러난다’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선취한다.
그에게 말은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창(窓)이었다.
그는 당시 사회가 아이를 “작은 존재”로 부르는 방식 자체가,
그들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짓는 언어적 억압의 구조라고 보았다.
따라서 ‘어린이’라는 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엄의 언어, 인권의 언어, 그리고 자유의 언어였다.
그의 말 속에는 “존재의 동등성”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 담겨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이에게도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칸트의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윤리학을,
한국적 현실 속에서 언어로 실천한 철학적 행위였다.
그는 서구철학의 이론을 몰랐지만, 실천을 통해 그것을 체현했다.
이처럼 방정환의 ‘어린이’ 개념은 단순한 감성적 배려가 아니라,
존재론적 평등의 실천철학이었다.
그의 문학과 언어는, 철학이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정환은 문학을 교육의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문학은 존재를 깨우는 언어의 예술이었다.
그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아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쓰려 했다.
그의 글에는 ‘가르침’이 아니라 ‘깨달음’이 있다.
그의 동화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아이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자각의 서사였다.
이는 단순한 감상주의 문학이 아니라,
존재론적 문학(ontological literature) 이었다.
방정환은 아이의 세계를 “미성숙한 세계”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세계를 “가장 순수한 존재의 원형”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동심(童心)은 인간이 타락 이전에 지녔던 순수의 상태였다.
그 순수함 속에는 윤리 이전의 윤리, 도덕 이전의 도덕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방정환의 인본주의적 문학관이었다.
그는 “동심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인간을 이성의 동물로 한정하지 않고,
감성과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진정한 존엄을 찾으려는 존재의 철학적 탐구였다.
방정환의 철학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을 사회적 운동으로 실천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20년대의 소년운동은 단순한 문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철학적 저항이었다.
그가 주도한 ‘소년운동’은 어린이의 인권, 교육의 평등,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사회적 사상운동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어린이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그 목소리를 사회의 언어로 변환시켰다.
‘어린이날’ 제정운동은 그 철학의 결정체였다.
그는 “어린이에게도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아이를 단순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주체적 존재로 선언한 철학자였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의 ‘인권교육’, ‘평등교육’의 원형이 되었다.
그는 말로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문학과 사회, 언어와 인간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문명과 경쟁사회 속에서,
‘어린이’를 또다시 효율과 생산성의 틀로 평가한다.
아이들은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성과를 내야 하는 존재로 재구성되고 있다.
방정환의 철학은 바로 이 시대의 거울 앞에서 빛을 낸다.
그는 100년 전 이미 “존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오늘날의 교육철학과 인권담론이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한 근원적 답변이다.
방정환이 만든 ‘어린이’라는 말은 단지 과거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철학적 명제다.
그의 사유 속에서 어린이는 “미래의 어른”이 아니라,
현재적 인간(here-and-now human) 이다.
그는 어린이를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보는 시각을 비판했다.
그에게 어린이는 이미 “지금의 인간”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철학적 사유의 주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날의 아동문학은 여전히 교훈 중심적이거나,
상품화된 감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방정환의 문학은 그와 달랐다.
그는 문학을 통해 “어린이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보다 더 깊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정환은 단순히 동화를 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를 다시 쓴 철학자였다.
그의 ‘어린이’ 개념은 인간의 존재를 다시 정의했고,
그의 문학은 철학의 언어로 작동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존재의 평등, 언어의 윤리, 교육의 인간화이다.
그는 철학을 글로 쓰지 않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철학서’였다.
오늘의 아동문학이 그의 정신을 잊는다면,
그것은 문학이 인간을 잃는 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어린이를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물음 속에서,
방정환의 철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언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
“너는 인간을 존중하는가, 아니면 단지 평가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