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심지어 연구의 초안까지 제시한다. 효율과 속도만 놓고 보면 인간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기계에 뒤처졌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묻는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숙련의 가치는 흔들리며, 노력의 보상 구조마저 바뀌고 있다. 기술이 모든 것을 바꿔 놓는 시대에, 끝까지 지켜야 할 인간의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김상욱 교수는 단호한 답을 내놓았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최신 기술도, 새로운 도구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것들이었다. 역사, 철학, 예술,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그리고 수학·물리·화학·생물로 대표되는 기초과학이었다.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물리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역설적으로 기술 만능주의에 제동을 건다.
역사는 인간이 무엇을 반복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철학은 인간이 무엇을 고민해 왔는지를 기록한다. 예술은 인간이 무엇을 느끼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낸다. 이 세 가지는 생산성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나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기술이 ‘어떻게’를 대신해 주기 시작하자, 인간에게 남은 질문은 ‘왜’와 ‘무엇을’로 수렴됐다. 이 질문들은 오직 역사와 철학, 예술의 언어로만 제대로 다룰 수 있다.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단순한 문해력이 아니다.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하며,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교환하는 능력이다. AI는 문장을 생성하지만, 맥락 속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말의 결과를 감당하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래서 언어 능력은 기술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기초과학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응용 기술은 시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지만, 자연을 이해하는 기본 원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기초과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인간의 사고 훈련이다. 계산보다 이해를,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 가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속도’보다 ‘깊이’를 요구한다. 즉각적인 성과를 약속하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사고의 근육을 키운다. 그래서 시장 논리에서는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AI가 효율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지금, 깊이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오히려 희소 자원이 됐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판단의 책임이 인간에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AI는 선택지를 제시하지만, 선택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의미 있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는 인간의 몫이다. 역사와 철학, 예술, 기초과학은 바로 이 판단 능력을 길러 왔다. 그래서 이 학문들은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되지 않는다.
교육의 방향도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기술 숙련에만 집중한 교육은 기술의 수명만큼만 유효하다. 반면 사고의 틀을 길러 주는 교육은 기술이 바뀔수록 가치가 커진다. AI 시대의 교육은 새로운 것을 더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붙잡을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었다.
AI는 도구다. 그러나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의 성숙함이 중요해진다. 역사를 배우는 일은 인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철학을 공부하는 일은 기술이 허용하는 것과 인간이 허용해야 할 것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을 세운다. 예술은 효율로 환산되지 않는 삶의 가치를 지켜 낸다.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언어의 윤리를 만든다. 기초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인간의 사고력을 단련한다.
김상욱 교수가 강조한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들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일을 대신해도, 인간이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대신 답해 주지 않는다. 그 질문을 외면하는 순간, 기술은 진보가 아니라 공백이 된다.
AI 시대의 생존 전략은 의외로 단순하다. 새로운 기술을 좇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래된 공부를 버리지 않는 일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변하지 않는 것에 기대야 한다. 그것이 기술의 시대를 살아남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