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선택이 신과 인간의 거리를 갈랐다
창세기 3장 1-13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에덴동산의 평화로운 장면 속에 들어온 ‘뱀’의 한 마디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욕망을 깨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든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순수한 피조물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매일 ‘선악과’를 손에 쥐고 있다. 유혹의 본질은 시대를 초월하고, 하나님의 경계선은 여전히 인간의 선택 앞에 서 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
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참으로’라는 단어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는 유혹의 정석이다.
악은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의심을 심어 놓는다.
그 의심은 시간이 지나며 확신처럼 자라난다.
오늘날 우리는 이 ‘뱀의 언어’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할까?”, “한 번쯤은 괜찮겠지?”라는 말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무너뜨린다.
유혹은 크지 않다. 단지 “생각을 흔드는 말”에서 시작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
욕망은 시각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타락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신의 기준보다 앞세운 결과다.
‘보기에 좋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이 둘을 혼동한다.
오늘날 소비주의, 성공주의, 자기만족의 시대 속에서도 ‘보암직한 것’의 유혹은 여전하다.
그 결과, 우리는 신의 질서가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선악을 정의한다.
에덴의 선악과는 단지 금지된 과일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묻는다. “누가 너의 벗은 것을 알게 하였느냐?”
아담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의 말 속에는 회개가 없었다. 대신 책임 전가가 있었다.
인간은 잘못보다 변명을 먼저 배웠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잘못의 본질보다 ‘책임을 피할 방법’을 찾는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뜨린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가 깨질 때, 타락은 완성된다.
죄의 결과는 ‘벌’이 아니라 ‘단절’이다.
타락 이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부르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책망이 아니라 초대였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찾으신다.
죄를 지은 인간은 숨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짧은 질문 안에는 사랑과 회복의 씨앗이 있다.
‘하나님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숨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부르신다.
이것이 은혜의 시작이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 질문은 여전히 울린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물음은 단지 죄의 자각을 넘어, 돌아오라는 부름이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단지 ‘첫 번째 죄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인간의 일상이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순간에 선악과를 손에 쥔다.
유혹은 늘 합리적이고, 욕망은 늘 그럴듯하며, 변명은 늘 빠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묻는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창세기 3장은 결국 죄의 이야기이자 사랑의 이야기다.
인간이 떠났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복음의 씨앗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