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인류의 정치 실험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전체주의 체제’였다. 그중에서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자발적 조직화 탄압은,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운 ‘인민의 해방’이라는 이상이 실제로는 ‘국가 권력의 절대화’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전체주의는 단순한 독재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모든 영역—정치, 경제, 문화, 사상까지—를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완전한 지배 시스템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 즉 독립적 결사체는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전체주의가 싫어하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인들의 연대다.
토크빌이 “자발적 결사는 민주주의의 학교”라 했듯, 시민사회는 자유의 실험장이자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레닌이 이끌던 ‘전위정당’ 모델은 바로 그 결사를 당의 전유물로 바꾸었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체제는 권력의 집중을 ‘해방의 수단’으로 포장했고, 결국 영구적 통제 체제로 변질되었다.
이 괴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마오쩌둥은 ‘반혁명’을 명분으로 종교 단체를 해체하고, 지식인을 수용소로 보냈으며, 심지어 가족조차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계급 없는 평등 사회’는 실상 ‘새로운 특권층과 감시체제의 사회’로 전락했다.
마르크스가 꿈꾼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은 레닌과 마오의 손에 의해 ‘자유의 완전한 부정’으로 바뀌었다. 국가의 소멸은커녕 국가 권력은 절대화되었고, 노동자의 해방은 철저한 통제로 변했다. 결과적으로 ‘해방의 수단’이 ‘억압의 구조’가 된 것이다.
공산주의의 근본적 모순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권력의 집중과 분산의 모순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권력의 분산이 필요하지만, 혁명 완수를 위해 권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딜레마다.
둘째, 자유와 통제의 모순이다. 궁극적 자유를 위해 현재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논리적 자가당착.
셋째, 수단과 목적의 모순이다. ‘선한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혁명 논리는 결국 목적 자체를 파괴한다.
문화대혁명 이후 수십 년이 흘렀지만, 중국은 여전히 그 모순을 안고 있다. 경제는 시장으로 열렸지만, 정치와 시민사회는 통제 속에 묶여 있다. NGO와 인터넷 공간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지만, 국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는 없다.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억압’의 공존, 그것이 현대 중국의 최대 딜레마다.
공산주의 체제의 자발적 조직 탄압은 사회적 신뢰와 협력을 파괴하고, 시민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동유럽의 역사에서도 증명했다. 하벨이 말한 “시민사회의 복원”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 회복의 문제였다.
오늘날 디지털 감시 시대에 들어서며,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기술의 이름으로, 효율의 명분으로 시민의 자유가 다시 통제받고 있다.
엔트뉴스는 이 점에서 다음의 교훈을 제시한다. 자발적 결사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며, 권력의 분산은 인간 존엄의 최소 조건이다.
인류의 역사는 반복되는 권력의 유혹 속에서도, 결국 자유를 향한 의지로 나아갔다. 전체주의가 아무리 거대해도, 자발적 시민들의 연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 해방’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