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 본토, 이른바 야마토와 동일한 흐름 위에서 전개되지 않았다. 지리적 위치와 자연환경, 외부 세계와의 접촉 방식은 오키나와를 일찍부터 해양 중심 사회로 이끌었고, 그 결과 정치·문화·종교 전반에서 독자적인 역사 궤적을 형성했다.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 내부의 변방사가 아니라,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한 별도의 역사 공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 본토가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로 구분되는 것과 달리, 오키나와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12세기 무렵까지 패총 시대라 불리는 독자적 선사 단계를 유지했다.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해양 자원은 수렵과 채집 중심의 생활을 장기간 지속하게 했고, 이로 인해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농경 사회로의 전환은 본토보다 늦게 나타났다.
석회암 지형이 발달한 오키나와에서는 미나토가와 유적에서 약 1만 8000년 전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일본 열도 인류사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시기 오키나와는 이미 본토와 다른 인구 구성과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12세기 이후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각지에는 안지(按司)라 불린 지역 지배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석축 성곽인 구스크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14세기 초 오키나와 본도는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 세 정치 세력으로 나뉘는 삼산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기의 정치 구조는 일본 본토의 막부 체제와는 성격이 달랐다. 각 왕국은 독립된 외교 주체로서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으며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무역과 외교 능력이 곧 정치적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1429년 중산의 통치자 쇼하시왕(尚巴志)이 삼산을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했다. 이후 류큐는 중국,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 무역국으로 성장하며 대교역 시대를 맞았다.
류큐는 명나라의 책봉 체제 안에서 공식 교역국 지위를 확보했고, 이를 기반으로 동중국해 해상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다. 포르투갈 기록에 레키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할 만큼 국제적 인지도도 높았다. 이는 일본 본토가 점차 대외 교류를 제한해 가던 흐름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1609년 사쓰마번의 침공 이후 류큐는 일본의 군사적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왕국 체제는 유지되었다. 사쓰마는 명과의 조공 무역 이익을 위해 류큐를 중국에 대해 독립국처럼 유지했고, 그 결과 류큐는 일본과 중국 양쪽에 예속되는 일·중 양속 체제라는 특수한 지위에 놓였다.
국왕 교체 시 에도로 사절단을 파견하는 에도노보리에서는 일부러 중국풍 복장을 착용하게 했고, 이는 류큐가 일본과 다른 이국임을 연출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다.
1879년 메이지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류큐 왕국을 해체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다. 이른바 류큐 처분이다. 이는 본토의 폐번치현보다 늦게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도 인두세 등 기존 제도를 유지하는 구관 온존 정책이 시행됐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의 근대적 권리 보장은 본토보다 수십 년 늦어졌고, 사회적 격차와 차별은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에서는 일본 유일의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졌다. 전쟁 후에도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미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달러 사용과 우측통행 등 독특한 사회 체계를 경험했다. 이 시기는 미국세라 불리며 본토의 전후 복구 과정과는 전혀 다른 기억을 남겼다.
이 기사는 오키나와 역사를 일본 지방사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해양 문명사로 재조명한다. 독자는 류큐 왕국과 오키나와가 형성한 복합적 정체성을 이해함으로써 동아시아 역사 인식의 폭을 확장할 수 있다.
오늘날 오키나와는 일본의 한 현이지만, 그 역사적 뿌리는 류큐 왕국이라는 별도의 국가 경험 위에 놓여 있다. 패총 시대의 장기 지속, 해양 교역국의 번영, 일·중 양속 체제, 그리고 미군 통치의 기억은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와 명확히 구분 짓는 역사적 층위를 형성한다. 오키나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일본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갖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