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큐(琉球,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문자의 전래는 단순한 문화 수용이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오랜 세월 구전(口傳)에 의존하던 공동체는 문자의 도입을 통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고, 이는 국가 운영과 통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도구로 기능했다.
류큐에 문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는 13세기 중반으로 파악된다. 에이소(英祖) 왕통 시기인 1265년, 일본에서 건너온 승려 젠칸(禅鑑)이 우라소에(浦添)에 극락사(極楽寺)를 세우면서 불교와 함께 문자 문화가 전해졌다. 이 시점은 종교 수용과 문자 도입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례로 평가된다.
초기 류큐에서 사용된 문자는 일본식 표음문자인 히라가나였다. 당시 작성된 석비(石碑)나 고문서에는 한자와 히라가나가 섞인 형태가 확인되며, 이는 류큐 사회가 외래 문자를 선택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문자가 정착된 이후 류큐는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병행했다.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는 한자와 가나가 혼합된 일본식 문체가 사용됐고, 명·청과의 외교에서는 전통적인 한문이 쓰였다. 왕실과 사족 가문의 족보인 가푸(家譜) 역시 한문으로 작성됐다.
문자는 문학과 예술 영역에서도 활용됐다. 류가(琉歌)와 구미오도리(組踊) 같은 예술 작품은 류큐어를 문자로 기록함으로써 구전 예술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
문자의 가장 큰 성과는 고대 가요의 기록이다. 16~17세기에 편찬된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는 구전되던 1,500여 수의 가요를 문자로 남겨 류큐인의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를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문자는 통치 체제 강화에도 기여했다. 1650년 편찬된 《중산세감(中山世鑑)》을 시작으로 역사서가 제작되며 왕통 계보와 국가 정체성이 정리됐다. 이후 계도좌(系図座)가 설치되면서 족보 작성이 의무화됐고, 문자를 통해 신분 질서가 고착화됐다. 법전 제정 역시 문자 행정의 산물이었다.
문자의 전래는 류큐를 구전 사회에서 기록 사회로 이행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종교, 외교, 행정, 예술 전반에 걸친 변화는 류큐 왕국의 중앙집권화와 국제적 정체성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류큐는 동아시아 해양 세계 속에서 독자적인 국가 운영 모델을 구축할 수 있었다.
류큐에 도입된 문자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문자는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었고, 기록은 왕권과 제도를 만들었다. 히라가나와 한문을 상황에 따라 병용한 류큐의 문자 문화는 이 지역이 단일한 문화권이 아닌, 복수의 세계와 연결된 해양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