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쇼팽으로 시작하는가
한 작곡가로 여는 클래식 음악 연재의 이유
김선용(클래식신문 대표)
클래식 음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는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아이도, 클래식을 잘 모르는 독자도, 쇼팽이라는 이름에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익숙함은 종종 오해를 낳는다. 쇼팽은 너무 많이 연주되고, 너무 자주 소비된 작곡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바로 그 익숙함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왜 다시 쇼팽인가.
쇼팽은 드물게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작곡가다. 클래식 입문자에게 그는 가장 먼저 만나는 이름이다. 녹턴과 왈츠는 어렵지 않게 귀에 들어오고, 감정의 흐름도 비교적 분명하다. 반면 전공자에게 쇼팽은 끝까지 파고들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존재다. 템포, 루바토, 페달, 음색의 균형은 연주자마다 전혀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일반 독자에게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진다. 조국을 떠난 망명자, 병약한 육체, 사랑과 이별, 고독 속에서 음악을 쓴 인간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읽힌다. 한 작곡가가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쇼팽을 이야기할 때 음악과 삶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폴란드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파리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다. 건강은 늘 불안했고, 인간관계 또한 평탄하지 않았다. 이 삶의 조건들은 그의 음악에 직접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쇼팽의 작품은 웅장한 선언보다 낮은 목소리에 가깝고, 확신보다는 망설임에 가까운 순간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악보를 읽는 일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따라가는 작업에 가깝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작품의 형태다. 쇼팽의 곡은 대체로 길지 않다. 한 곡 한 곡이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밀도가 높다. 녹턴 한 곡, 프렐류드 한 악장만으로도 하나의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서사가 분명하다. 이는 컬럼 연재라는 형식과 잘 맞는다. 대규모 교향곡보다, 한 사람의 감정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음악이 글의 형식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쇼팽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작곡가도 아니다. 오늘날 콩쿠르, 입시, 연주회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작곡가 가운데 하나가 여전히 쇼팽이다. 수많은 연주자가 쇼팽을 통해 평가받고, 또 쇼팽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쇼팽을 다룬다는 것은 음악사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지금 이 시대 음악가들이 서 있는 현실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의 음악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연주되고 해석되며 살아 움직인다.
무엇보다 쇼팽의 음악은 기교보다 내면을 먼저 요구한다. 빠르고 정확하게 연주하는 능력만으로는 그의 음악을 설명하기 어렵다. 소리 사이의 여백, 호흡, 침묵까지 포함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쇼팽은 늘 연주자와 청중에게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잘 치는가보다, 무엇을 전하려 하는가를 묻는 음악이다.
이 연재는 작곡가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작품을 해설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인간을 읽고, 작품을 통해 시대와 감정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그 출발점으로 쇼팽만큼 적합한 인물은 많지 않다. 그는 친숙하지만 얕지 않고, 많이 연주되지만 쉽게 닳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재는 쇼팽으로 시작한다. 쇼팽의 음악을 다시 듣는 일은, 클래식을 새롭게 읽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