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거벗은 아버지와 덮어준 두 아들 : 수치와 존중 사이의 신앙 윤리
홍수 이후, 인류는 새로운 출발선 위에 섰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의인’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9장 18–29절은 그 의인이 실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 장막 안에 누운 노아, 그리고 그를 대하는 세 아들의 태도는 인간의 죄성과 신앙 윤리의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이 짧은 본문은 인간이 은혜를 경험한 후에도 여전히 연약함 속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수치를 대하는 태도’가 신앙의 품격을 결정짓는다는 영원한 교훈을 남긴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온 세상을 덮은 홍수를 견딘 인물이었다. 그는 믿음의 상징이자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한다.
이 장면은 은혜 이후의 방심이 얼마나 쉽게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실수는 단순한 음주 사건이 아니다. 이는 “은혜 후의 자만”에 대한 경고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클수록, 사람은 더 겸손하고 경계해야 한다. 은혜를 받은 후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아들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말한다. 성경은 그가 단순히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보다’(히브리어 라아)는 ‘흥미롭게 주목하다’, ‘드러내다’의 의미를 가진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조롱하고 폭로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선의 태도다. 인간의 눈은 단순히 보는 기관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드러낸다. 함의 시선은 존중이 아니라 경멸이었다. 그의 말은 공동체 안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비난의 언어였다.
오늘날 SNS 시대의 ‘노출 문화’와 ‘비판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함의 시선을 얼마나 닮아 있는가. 누군가의 실수를 보고 즐기며, 그 수치를 드러내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이 본문은 “수치를 보지 말라”는 신앙의 자제력을 요구한다.
셈과 야벳은 함과 달리,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기 위해 옷을 들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노아를 덮었다. 이 장면은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침묵’의 순간이다.
‘덮음’은 단순히 신체를 가리는 행위가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실천이다. 이는 신약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의 예표이기도 하다.
셈과 야벳의 행동은 믿음의 윤리를 보여준다. 인간의 실수를 판단하는 대신, 덮어주는 사랑을 선택했다. 하나님은 이들의 태도를 기뻐하시며, 그 복이 셈의 장막과 야벳의 후손에게 이어진다.
덮음의 윤리는 오늘 우리 신앙 공동체가 다시 회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미덕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가족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함의 후손 가나안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의 후손은 복을 받는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보면, 이 ‘수치의 저주’ 위에도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이 흐른다.
놀랍게도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가나안 땅의 여인 라합과 룻이 등장한다. 수치와 저주의 땅에서도 구원의 씨앗이 자란 것이다.
수치를 덮어주는 사랑, 이것이 곧 복음의 본질이다.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로 덮으신 하나님의 사랑. 창세기 9장의 장막 안에서 시작된 덮음의 이야기는, 갈보리 언덕에서 완성된 ‘은혜의 덮음’으로 이어진다.
이 본문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되, 서로의 수치를 덮어주는 사랑 속에 신앙의 존귀함이 있음을 일깨운다.
창세기 9장 18–29절은 단순한 가족 내 사건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신앙 윤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보는 눈’과 ‘덮는 손’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누군가의 실수를 드러내는 함의 세상 속에서, 셈과 야벳처럼 ‘덮음의 믿음’을 회복하는 이들이 진정한 신앙인이다.
그것이 곧 은혜 받은 자의 품격이며,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사랑의 윤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