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세기 초 류큐 열도는 오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오키나와 본도에는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이라 불린 세 정치 세력이 병존하며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권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삼산 시대라 불린 이 시기는 지역 간 충돌과 외교 경쟁이 반복되던 불안정한 국면이었다.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한 인물이 바로 쇼하시(尚巴志)이다.
쇼하시는 본도 남부 사시키(佐敷)를 거점으로 성장한 유력 안지(按司)였다. 사시키는 마텐(馬天), 요나바루(与那原) 등 항구와 가까워 해상 교통과 교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쇼하시는 이 장점을 활용해 해외 상인과의 거래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외국에서 철을 들여와 농기구를 제작해 지역 농민에게 공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력 확충과 동시에 민심을 확보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의 정치적 도약은 1406년 중산 정권의 변동에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중산을 다스리던 무녕(武寧)은 통치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이를 기회로 삼아 쇼하시와 그의 부친 쇼시쇼(尚思紹)는 우라소에 구스쿠를 공략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무녕은 축출되었고, 쇼시쇼가 중산왕으로 추대되며 제1쇼씨 왕조가 출범했다. 이후 쇼하시는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국정 전반을 주도했다.
중산 장악 이후 쇼하시는 통일을 향한 군사적 행보를 가속화했다. 1416년에는 북부의 요충지 나키진 구스쿠를 거점으로 하던 북산왕 한안치(攀安知)를 공격했다. 험준한 지형과 견고한 성채로 버티던 북산은 전략적 공세 앞에 결국 붕괴되었고, 북부 지역은 중산의 지배 아래 편입되었다.
마지막 남은 세력은 남산이었다. 쇼하시는 장기간의 압박과 군사 행동 끝에 1429년 남산왕 타로마이(他魯毎)를 제거하며 오키나와 본도 전체를 통합했다. 이로써 약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삼산 시대는 막을 내렸고, 통일 국가 류큐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통일 이후 쇼하시는 국가 운영의 중심을 슈리(首里)로 재편했다. 그는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정치 중심지를 옮기고, 슈리성을 왕권의 상징이자 행정의 중심으로 정비했다. 1427년에는 중국 출신 국상(國相) 회기(懐機)의 주도로 류탄(龍潭) 연못을 조성하고 도성 주변을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슈리는 명실상부한 왕도로 자리 잡았고, 인근 나하항은 국제 무역의 관문으로 성장했다.
대외 관계에서도 쇼하시의 통치는 두드러졌다. 그는 명(明) 왕조와의 조공·책봉 체제를 강화해 국제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명 황제로부터 ‘쇼(尚)’라는 성을 하사받았고, 이는 왕조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공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류큐는 중국뿐 아니라 일본, 조선, 샴(暹羅, 태국), 자와(Java), 말라카 등 동남아 각지와 교역하며 해상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이 시기 류큐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일본과 동남아로 중계하고, 남방의 향신료와 상아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류큐 특유의 세련된 궁정 문화와 예술, 외교 의례가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쇼하시가 이룬 삼산 통일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이는 분산된 지역 권력을 중앙집권적 체제로 재편하고, 해양 교역을 기반으로 한 국가 운영 모델을 확립한 사건이었다. 비록 제1쇼씨 왕조는 약 60여 년 뒤 제2쇼씨 왕조로 교체되지만, 슈리를 중심으로 한 통치 구조와 국제 무역 질서는 이후 수세기 동안 류큐 왕국을 지탱하는 근간으로 작용했다.
쇼하시의 통일은 류큐 열도를 하나의 정치·경제 공동체로 묶은 결정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 류큐는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핵심 거점으로 도약했으며, 안정된 왕권과 국제적 위상을 동시에 확보했다.
15세기 초 쇼하시의 선택과 전략은 류큐를 변방의 섬에서 국제 해양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통일과 제도 정비는 이후 450여 년간 이어질 류큐 왕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