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에요. 근데, 그냥 믿고 싶었어요.”
이 말은 많은 이별 후의 인터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고백이다. 우리는 속았다고 말하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그 말투의 얄팍함, 눈을 마주치지 않는 불편함,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들, 감각은 이상 신호를 감지했지만, 마음은 애써 외면했다. 왜냐하면 진실보다도 관계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에 속는 건 무능해서가 아니다. 바보 같아서도 아니다. 믿음이라는 감정은 논리가 아니라 관계를 선택하는 뇌의 결정이다. 우리는 알면서도 속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것이다.
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반응 중 하나가 신뢰하려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협력과 유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적으로 선택해 온 감정이다. 의심부터 시작했다면 공동체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진실하다고 전제한다. 이를 기본 진실 편향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너를 좋아해”라고 말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뇌의 디폴트 반응이다. 이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신뢰 편향이 유지되어야 할 진심과 구별 없이 작동한다는 데 있다.
즉, 우리는 믿고 싶은 사람을 믿고, 듣고 싶은 말을 듣고, 그 순간의 따뜻함에 안도하며 의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거짓말은, 그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내 감정이 일으킨 착각이기도 하다.
한 번 믿기 시작한 사람의 말은 쉽게 의심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상한 정황이 나타나도, 우리의 뇌는 그것을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바빴겠지”, “그럴 수도 있지”, “나한테 말 못한 이유가 있겠지.” 이런 식으로 우리는 스스로의 감각을 속이고, 마음을 덮는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인지 부조화라는 심리 구조다. 이는 내가 믿고 싶은 것과 실제 드러난 정보 사이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불편한 감정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한다. 그래서 믿는 쪽으로, 익숙한 감정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진실이 아무리 가까이 와도, 우리가 이미 마음으로 받아들인 거짓이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
“설마 그럴 리 없어.”
이 말은 대부분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선택을 향한 방어다. 내가 속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거짓말은 무섭기보다 슬프다. 속은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 속였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거짓말에 반복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타인을 너무 쉽게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 쉽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직감은 이상 신호를 보내고, 감정은 불편함을 느끼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눌러가며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거짓말을 들었다는 건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경고를 무시했다는 내 감정에 대한 실망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간파하는 기술보다, 내 감정을 더 자주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보다, 내가 그 말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가 더 중요하다. 편안했는지, 불편했는지, 위로가 되었는지, 의심이 들었는지, 감정은 언제나 정직하다. 그리고 그 정직함을 믿는 것이, 진짜 관계를 지켜주는 기술이다.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실수를 숨기기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착한 거짓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남의 거짓말보다도 내가 내 감정을 속인 대가로 더 큰 상처를 입는다. 거짓말은 외부에서 온다. 하지만 자기기만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상처는 더 깊고 오래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타인을 의심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신뢰하는 용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