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주기도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축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와 역사, 물질과 영성, 용서와 성령, 그리고 소유 중심의 삶에서 사랑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치밀하게 해석한다. 일상의 경제적 필요를 넘어, 타자를 살리는 ‘세 덩이의 떡’의 영성을 통해 having mode에서 loving mode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신학적·실천적 묵상이다.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의 중심부에 놓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는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칫 형식적인 문장으로 흘려버리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의 설교 안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목적, 삶의
방향, 사랑의 형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열쇠로 재조명된다.
그는 이 기도가 단순히 “오늘 먹고 살 만큼의 밥을 달라”는
소박한 생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움직이는 역사, 우리의
구체적인 경제 생활, 그리고 타자를 향한 사랑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드리는 깊이 있는 신학적 요청임을
치밀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의 결론에는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관점 전환, 곧 having mode에서 loving mode로의 전환, 다시 말해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며 존재하느냐”가 삶의 본질이라는 복음적 선언이 놓여 있다.
주기도문은 두 개의 근본 전제를 선포하며 시작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장재형(Olivet University설립)목사는 이 두 청원을 인간 존재의 목적을 규정하는 근본 명제라고 해석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역사는 어디를 향해 흐르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
성경은 분명하게 답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이미 하늘에서 완전하게 성취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도록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창조 목적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이 세상은 저 세상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증언하듯이, 그는 하늘나라를 본체(本體), 이
세상을 그 본체에 비친 그림자이자 투영(projection)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연적인 방황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결론을 향해 수렴해 가는 거대한 여정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식 위에 주기도문의 다음
간구,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위치한다는 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장엄한 우주적 비전이 선포된 직후에 곧바로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 곧 빵과 밥, 돈의 문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일용할 양식”은 결코 추상적인 영적 상징이 아니다. 영어 성경이 “daily bread”라고 번역하듯, 문자 그대로 매일 먹는 빵, 매일의 식탁, 오늘 필요한 생계비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가리켜 “지극히 정직한 기도”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결코 “먹고 사는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비현실적인 영성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가 먹고 살 것을 구하라. 오늘 필요한 양식을 간절히 구하라”고 명하신다. 동시에 신명기 8장 3절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못박는다. 떡, 곧 빵과 돈은 삶의 필요조건이지만,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긴장,
곧 물질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물질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긴장 위에 성경적 영성이 서 있다. 인간은
말씀으로 살아야 하지만, 그 말씀은 우리의 떡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이때 주기도문에 등장하는 독특한 헬라어 한 단어가 새롭게 의미를 드러낸다.
“일용할”로 번역되는 “에피우시오스(epiousios)”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주기도문에만 사용되는 희귀한 표현으로, “오늘을 위한, 그날에 꼭 필요한,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이라는 뉘앙스를 함께 품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탐욕적인 축적을 정당화하려는 청원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갈 정도의 충분함”, 하나님께 의존해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의 넉넉함을 구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장재형목사의 해석에서 이 “충분함”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만의 충분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누가복음
11장이 매우 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11장은 누가가 전해 준 주기도문과 함께, 기도의 핵심 주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 하나님 나라, 일용할 양식, 용서. 가장
앞에는 역사의 종착점이자 목표인 하나님 나라가 자리하고, 맨 마지막에는 모든 인간관계를 재구성하는 용서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아주 현실적인 한가운데에 ‘일용할 양식’이 놓여 있다. 마치
하나님 나라와 용서라는 두 거대한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처럼, 이 일용할 양식의 간구가 위치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사람을 용서하며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 모든 과정 안에는 언제나 빵과 밥, 돈이라는 구체적인 필요가 끼어든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질적 필요 자체를 기도의 주제로 허락하시면서, 동시에
그 필요를 통해 사랑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게 하신다.
누가는 이어서, 이 일용할 양식의 무게를 설명하기 위해 “밤중에 친구의 집을 찾아간 사람”의 비유를 소개한다. 유대 사회에서 한밤중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상식과 예의를 심각하게 거스르는 행동이다. 문이 닫히면 하루가 끝난 것이고, 가족이 이미 한 방에 둘러 누워
잠든 상태에서 문을 두드리는 일은 공동체의 이너 서클을 침범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한밤중에 친구 집에 찾아와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말한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라,
무려 세 덩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세 덩이”라는 표현에 신학적 상징성을 부여한다. 자기 한 끼를 해결하려면 떡 한 덩이면 족하다. 두 덩이는 내가
당장 먹고 또 한 번 더 먹을 정도의 여유일 것이다. 그러나 세 덩이는 나를 넘어서 타자를 향해 나눌
수 있는 몫, 즉 남을 위해 준비된 여분을 의미한다. 세
덩이를 구한다는 것은 “내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내 집에 찾아온 배고픈 손님을 먹이기 위해” 구하는 것이다. 이 순간 “일용할 양식”의
개념이 급격히 확장된다.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연명할
최소한”이 아니라, “나와 이웃이 함께 사람답게 살아갈 만큼의
넉넉함”이다.
유대인은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다”는 구약의 정신을 품고 있는 민족으로, 체면과 예의를 중시하고, 상대를 불필요하게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런
유대인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과감한 결단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무례해 보일 만큼 끈질긴 간청”, 곧 강청(抗請, shameless persistence)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신다.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라는
강력한 동력을 읽어낸다. 이 사람을 밤중의 거리로, 굳게
닫힌 문 앞으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강청의 자리로 이끄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배고픈 손님을 먹이고자 하는 절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떡을 가진
친구의 마음을 움직이고, 결국 “그 소용대로”, 필요한 만큼 넉넉히 주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는 현대 문명을 지배하는 having mode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는 “I have…”가 넘쳐난다. 내가 가진 집, 가진 자산, 가진 스펙, 가진
인맥이 곧 나의 정체성과 가치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다. 그러나 이 소유 중심적 패러다임은 구조적으로
결핍을 전제한다. 아무리 가져도 늘 부족하고, 더 가져야만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복음은 having mode에서 being mode로, 나아가
loving mode로의 변화를 요청한다. 단지 “어떻게
인간답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수준을 넘어, “어떻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비워내며 존재할 것인가”라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사용하는 loving mode라는 표현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내 필요만
채우는 수준의 일용할 양식에서, 이웃의 필요까지 함께 안고 구하는 세 덩이의 빵으로 나아가는 삶의 형식, 곧 자신의 소유를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는 존재 방식이 바로 loving
mode이다. 이 전환이 실질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얼마나 많이 쌓았는가”로 인생을 평가하지 않고,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가”로 삶을 해석하게 된다.
누가복음 11장은 이어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를 기록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단순한 기도 권장 문구가
아니라, 앞선 밤중의 친구 비유와 긴밀하게 맞물린 약속으로 읽어낸다.
기도의 출발점은 “구하면 응답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다”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결국 비극적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순간, 전혀 다른 가능성의 지평이 열린다. 기도는 막연한
자기 암시가 아니라, 응답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실제적 행위이며, “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는 찾아내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 준다.
누가는 곧이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이 진리를 더욱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는 없고,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다. 악한 인간 아버지조차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어떠하시겠는가. 그리고 절정의 한 문장이
이어진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기도의 궁극적 목표로 제시한다. 우리가 기도로 받게 되는 수많은 선물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고귀한 선물은 바로 성령이다. 구약 시대에는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물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온 백성이 그를 주목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든지 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2절이 밝히듯,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 성령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지 않으실 이유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와 “성령의 선물”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성령은 단지 초자연적 은사를 베푸는 영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 구조 자체를 새롭게 조형하시는 영이다. having mode의 탐욕과 자기 집착을 해체하고, loving mode의 사랑과 자기 비움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는 분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방식부터 달라진다. 나 혼자 편안히 살기 위한 안정된 장치, 나만을 위한 안전망을 구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억눌린 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필요를 담대하게 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세 덩이의 빵”을 구할 용기를 부어 주신다. 나와 타자를 함께 살릴 수 있는 넉넉함을
구하도록, 사랑 때문에 한밤중이라도 기꺼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거룩한 뻔뻔함을 갖도록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더해, 예수님과 베드로가 성전세를 납부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지라. 처음 올라오는 물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인데, 그
돈으로 너와 나의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사건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기적적 공급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장면을 “한 사람을 얻어 함께 문제를 해결하라”는 영적 비유로도 읽어낸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수록 새로운 필요가
생기지만, 동시에 새로운 동역자, 새로운 자원, 새로운 관계가 따라온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일은 단지 그
사람 한 명의 구원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헌신할 벗을 얻는 사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곧 사람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돈과 자원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떡을 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친구가 더해지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는 시험대 위에 서 있다. 더
소유하라는 압박,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다는 불안 마케팅, 더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성과주의가 교회 안에도 깊이 스며든다. 신앙조차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이용해 내 생존과 성공을 조금 더 안전하게 설계할 수 있을까”라는
기능적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가 “having mode에서
loving mode로 전환하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선포가 된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되, 나만을 위해 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타자를 위해 구하라는 것이다. 두 벌 옷이 있다면
하나는 내가 입기 위해,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내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세 덩이의 빵은 내가 배불리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밤중에 찾아온
배고픈 친구를 먹이기 위해 준비되는 여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풍요의
정의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된다. 많이 가진 사람이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많이 나누는 사람이 진정으로 풍요로운 사람이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를 참으로 부요하게 하셨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는 필연적으로 같은 궤적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구체적인 삶의 형태로 연결될 때 비로소 힘을 가진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 오늘
제가 살아갈 만큼의 필요를 채워 주시되,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볼 수 있을 만큼의 여분도 허락해
주십시오. 저의 쌀독과 지갑과 시간과 재능이 나만을 위한 저장고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통로가 되게 하소서.” 동시에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하나님, 혹시 제가 이미 받은 일용할 양식 중에
원래는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라고 주신 몫을 제가 움켜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양심과 생각을 비추실 때, 우리는 일상의 소비와 재정 운용, 관계와
시간 배분을 새롭게 설계하게 된다. 이 재구성이 바로 having
mode에서 loving mode로 옮겨가는 회심의 과정이다.
더 나아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언제나 용서의 기도로 이어져야
한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일용할 양식–용서라는 구조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물질과 관계를 동시에
다루지 않고서는 온전히 서지 못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려면 반드시 관계의 회복이 필요하고, 진정한 회복은 용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용서는 언제나 손해를 감수하는
쪽의 선택이며,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랑의 결단이다. 어쩌면
용서는 물질을 나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용할 양식”일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매일같이 공급해야 하는 인내, 관용,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구해야 할 중요한 필요이다. “하나님, 오늘도 제가 이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양식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처럼 일용할 양식은 빵과 밥과 돈을
넘어,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보이지 않는 자원 전체를 포괄하는 풍성한 개념이다.
결국 장재형목사의 설교가 우리를 초대하는 세계는 단순하지만, 동시에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세계이다. 하늘에서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역사는 흘러가고, 우리는 그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 나라를 위해 이 땅에
파송된 존재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오늘 먹을 것, 오늘 쓸 돈, 오늘 감당해야
할 사명과 관계를 위한 필요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나
하나 살아남기 위한 기도”로 머물지 않아야 한다. 배고픈
자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연약한 자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 사랑의 통로가 되기 위한 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기도의 정점에는, 우리 안에 그러한 사랑의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서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하나님 나라와 역사, 경제와 영성, 용서와 성령, having mode와 loving mode가 모두 응축되어 있다. 이제 이 기도를 입술로만
암송하는 단계를 넘어, 실존 전체로 살아내야 할 때이다. 오늘
내 식탁과 지갑, 일정표와 재능,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여백을 돌아보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제가
구하는 일용할 양식 속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세 덩이의 빵이 포함되게 하시고, 그 빵을 끝까지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저를 충만케 하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장재형목사가 증언하는 주기도문의 심장부이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품고 있는 복음의 깊이일 것이다.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