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된 연대기에서 살아있는 핏줄로
학창 시절 우리에게 '세계사'란 수면제와 다름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 1517년 루터..." 밑줄을 긋고 외우던 그 숫자들 사이에는 인간의 체온이 없었다. 그건 마치 죽은 자들의 묘비명을 외우는 일처럼 건조하고 황량했다. 그런데 최근, 서재의 한구석에서 우연히 집어 든 사이토 다카시의 책은 내 안에 죽어있던 역사 세포를 일깨웠다.
그는 말한다. 역사는 연도와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의 뜨거운 '감정'이 빚어낸 거대한 드라마라고.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 이 다섯 가지 힘이 바로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엔진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전율했다. 이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아침, 내가 마신 커피 한 잔에, 내가 무심코 클릭한 스마트폰 화면 속에, 그리고, 내 영혼이 갈망하는 구원의 문제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욕망의 액체, 그리고 자본의 질주
새벽기도를 다녀와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 습관처럼 커피를 내린다. 향긋한 아로마가 퍼질 때, 나는 문득 17세기 유럽의 어느 커피하우스를 떠올린다. 저자의 통찰대로, 커피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의 나른함을 깨우고 근대라는 '속도의 시대'로 진입하게 한 강력한 각성제였다.
하지만, 그 각성의 이면에는 서늘한 그늘이 있다. 우리가 누리는 이 향기로운 문명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착취당한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 즉 '니그로의 땀' 위에 세워졌다. 멈추지 않고 일하게 하는 커피의 힘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관차를 달리게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본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선물을 인간은 탐욕의 도구로 변질시켰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공'이라는 달콤한 카페인에 취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폭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커피잔을 든 손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소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슬픈 결별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경건한 '금욕'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즉 '소명(Calling)'이라고 가르쳤다. 구두를 깁는 일도, 밭을 가는 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벌어들인 돈을, 쾌락을 위해 쓰지 않고 다시 투자했다. 그 거룩한 절제가 자본 축적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영혼'은 증발하고 '껍데기'만 남았다. 노동은 더 이상 소명이 아니라 생존 수단이 되었고, 부의 축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우리는 칼뱅이 말한 그 치열한 경건함을 잊어버리고, 그저 돈이라는 우상(Mammon) 앞에 절하는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역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성실함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 하늘의 상급인가, 아니면 이 땅의 사라질 먼지인가?
시선의 권력: 신의 눈을 대체한 알고리즘
중세에는 라틴어 성경을 독점한 사제들이 권력을 쥐었다면, 현대는 '보는 자'가 지배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의 원근법에서 시작된 '시선의 권력'이 오늘날 구글과 같은 거대 IT 기업으로 이어졌다고 꿰뚫어 본다.
우리는 편리함을 대가로 우리의 모든 취향, 동선, 욕망을 검색창에 털어놓는다. 이것은 현대판 '판옵티콘(Panopticon)'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섬뜩한 영적 위기감을 느낀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셔야 한다(시편 139편).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이라는 '디지털 신'에게 우리의 마음을 매일 고백하고 있다.
이 거대한 정보 제국주의 앞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이 스마트폰의 추천 목록인가, 아니면 말씀의 묵상인가? '보는 권력'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보시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것인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몬스터와 이슬람을 향한 새로운 시선
20세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라는 세 마리 '몬스터'의 전쟁터였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명백하다. 인간의 '죄성(욕망)'을 무시하고 인공적인 낙원을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인간의 교만이 무너진 것과 같다. 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먹이 삼아 살아남았다.
그리고, 여기에 '이슬람'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축이 있다. 서구 미디어는 그들을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코란을 든 테러리스트로 묘사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제국은 세금(지즈야)만 내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관용을 보였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슬림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거짓된 영과, 그들을 적으로만 규정하여 혐오를 조장하는 우리의 닫힌 마음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군의 칼이 아닌, 십자가의 사랑을 들고 그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잃어버린 양들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잉크가 아닌 삶으로 쓰인다
책을 덮으며 나는 창밖을 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빌딩 숲의 불빛, 거리를 흐르는 자동차의 물결. 이 모든 풍경이 그저 흘러가는 일상이 아니라, 욕망과 신념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거대한 역사의 현장임을 깨닫는다.
역사는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다. 오늘 당신이 품은 작은 욕망, 당신이 클릭한 뉴스, 당신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 신념의 조각들이 모여 내일의 세계사를 만든다. 우리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Redemptive History) 속에서 각자의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작가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