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로마서 14장 13-23절을 통해 강조하는 형제사랑과 교회공동체의 화평, 자유와 절제, 신앙양심의 배려, 다양성 안의 교회일치를 깊이 있게 풀어낸 글
교회는 늘 “거룩”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만, 실제의 교회는 거룩을 향해 걸어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교회공동체에는 찬양이 있는 만큼 신앙갈등도 있고, 은혜의
고백이 있는 만큼 신앙양심의 충돌도 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로마서 14장 13-23절을 교회의 현실 한복판으로 끌어온다. 그는 이 본문이 단지
고대 교회가 겪었던 ‘우상 제물’ 논쟁을 다루는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서로의 믿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에 대한 복음적 해답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신앙의 성숙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확장으로만
판단되지 않고, 내가 무엇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가’라는 사랑의 능력으로 판별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때, 바울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결정적 위험을 꿰뚫어 보았다. 논쟁의 주제는 고기였지만, 실상 교회를 흔드는 것은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멸시와 판단, 그리고 자기 확신을 무기로 삼는 영적 폭력이다. 로마서 14장은 한쪽에게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라고, 다른 한쪽에게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라고 동시에 말한다. 이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자유를 가진 사람의 죄는 상대를 가볍게 여기는 오만으로 흐르기 쉽고, 절제를 택한 사람의 죄는 자기 기준을 절대화하여 공동체를 재단하는 정죄로 변질되기 쉽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위험을 동시에 경계하며, 교회일치의 핵심을 “서로를 넘어뜨리지 않는 사랑”에 둔다. 사랑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타인의 걸음을 보호하기 위해 내 걸음을 조정하는 실천이며, 무엇보다 공동체의 덕을 세움이라는 목적을 잃지 않는 영적 지성이다.
초대교회가 이 문제를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단순한 식단의 취향이 아니라 정체성과 기억, 상처와
회복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 고기는 과거의 우상 숭배와 결박의 상징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신학적 통찰을 확인하는 일상의 물건이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특정한 권면을 보냈다는 사실은,
당시 교회의 선교와 공동체 유지가 얼마나 섬세한 ‘배려의 윤리’를 필요로 했는지를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지식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지식이 사랑과 분리될 때, 즉 공동체를 살리는 방향성을 잃을 때, 그 지식은 사람을 세우기보다 사람 위에 군림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을 목회 현장에서 반복해서 확인해 왔다고 말한다. 교회
내에서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대개 사안의 크기가 아니라 말의 날카로움, 태도의 경직, 그리고 상대의 신앙양심을 배려하지 않는 무감각이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의 핵심은 “무엇이
허용되는가”의 판정이 아니라 “무엇이 사랑인가”의 분별이다. 바울이 제시하는 기준은 놀랍도록 명료하다. 내 선택이 다른 이를 실족하게 한다면, 그 선택은 ‘가능’하더라도 ‘선’은 아닐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자유와 절제를 대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유를
복음의 선물로 존중하면서도, 그 자유가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의 절제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유는 내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면허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여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과시하는 순간
자유는 폭력이 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을 때 자유는 복음의 향기가 된다. 이 논리는 교회의 수많은 갈등—술과 담배, 특정 문화적 관습, 예배 형식의 선호, 세대별 표현 방식, 심지어 신앙 언어의 어휘까지—에 적용된다. 어느 한편의 입장을 단죄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이 행동이 형제의 마음을 무너뜨리는가, 아니면 세우는가?” “이 말이 상대를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멀어지게 하는가?”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14장을 통해 교회공동체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
방향으로 수렴한다.
특히 “실족”이라는 단어는
교회 언어에서 종종 도덕적 실패로만 축소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실족은 그보다 깊다. 실족은 단지 넘어짐이 아니라, 넘어지게 하는 돌이 누군가의 길목에
놓였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께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극도로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공동체는 누군가를 다시 일으키는 손이 되어야지, 누군가를 넘어뜨리는 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경고가 교회 지도자나 몇몇 ‘강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윤리적
소명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내가 신앙적으로 맞는 말’을 하는 곳이기 전에, ‘내가 사랑으로 옳은 길’을 선택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옳은 길은 대개 더디고, 더 조용하며, 더 많은 자기 절제를 요구한다.
로마서 14장 17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선언은 그 자체로 교회 분쟁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한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을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교회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붙잡아야 할 중심은 사람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는 규범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은혜, 원수까지 품게 하는 화평,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희락이다. 여기서 의는 차가운 법정 용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롭게
세워진 관계의 정의이며, 평강은 단지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안전하게 만드는 관계적
안정성이고, 희락은 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에서 솟아나는 깊은 기쁨이다. 이런 핵심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다양성을 감당할 수 있다. 반대로 핵심이 흐려지면, 사소한 부차적 사안이 본질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순간 공동체는 쉽게 분열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장재형목사는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교회일치가 단조로운 획일성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교회는 동일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동호회가 아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배경과 성향, 문화적 기억과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장소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말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은,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차이를 넘어서는 더 큰 중심이 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중심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사람을 동일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을 같은 은혜 아래로 불러 모으는 힘이다. 그래서
교회는 각자의 결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고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다양성과 통일성은 서로를 위협하는 개념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는
서로를 완성하는 두 축이다.
이 통일성을 지탱하는 가장 현실적인 기술은 의외로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과 태도의 절제다. 로마서 14장은 “판단”과 “업신여김”이라는 두 단어를 통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언어의 형태를 드러낸다. 판단은
상대를 하나님 자리에서 재판하려는 마음이고, 업신여김은 상대를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둘 다 사랑의 반대편에 서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갈등이 대개 신학의 깊이에서 폭발하기보다, 일상의 언어와
시선에서 서서히 누적된다고 본다. “저 사람은 믿음이 약해.” “저
사람은 율법적이야.” “저 사람은 세상적이야.” 이런 한
문장이 어느 날 누군가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은 교리를 더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니라, 내 언어가 누군가에게 어떤 영적 기압으로 작용하는지를 헤아릴 줄 아는 섬세함을 포함한다. 교회는 진리를 말해야 하지만, 진리는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전달될
때 비로소 복음의 온도를 지닌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목사가 즐겨 강조하는 것이 “자발적 양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극단적인 결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음적 자유의
최고 형태를 보여준다. 참된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무엇이든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다. 교회공동체에서
강한 자가 강함을 증명하는 방식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권리를 한 발 뒤로 물리는 것이다. 동시에 연약한 자가 연약함을 신앙의 무기처럼 사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거룩하지만, 그
양심을 타인의 목에 걸어 공동체를 옥죄는 순간,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통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균형이야말로 초대교회가 몸으로
배운 교회일치의 지혜이며,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요청되는 성령의 분별이라고 말한다.
현대 교회가 맞닥뜨리는 갈등의 주제는 더 복잡해졌다. 우상 제물과
직접 연결되는 상황이 드물어졌다고 해서 로마서 14장이 낡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형제사랑과 실족의 윤리”는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된다. SNS에서의 발언, 온라인 문화의
소비, 특정 정치 성향에 대한 과도한 표현, 세대 간 예배
스타일의 충돌, 교회 내 리더십 구조에 대한 견해 차이, 선교
방법의 다양성, 심지어 ‘경건해 보이는 행동’의 기준까지도 서로 다른 양심을 자극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선택은 늘 같다. “옳음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보존”을 우선하는 선택이다. 물론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를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운반하라는 말이다. 진리가
칼이 될 때 공동체는 피를 흘리지만, 진리가 약이 될 때 공동체는 회복된다. 로마서 14장은 그 약의 처방전을 제공한다. “서로 비판하여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교회의 통일성은 단지 내부의 평화를 위한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선교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은 교회의 설교보다 교회의 관계를 먼저 읽는다. 교회가 스스로를 사랑으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세상에 사랑을 말한다면, 그
말은 힘을 잃는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 14장의 원리가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고 본다. 선교
현장은 언제나 문화적 차이로 가득하다. 어떤 문화에서는 직접적인 권면이 사랑이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그것이 무례가 된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자유로운
표현이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공동체에서는 질서의 파괴로 느껴질 수 있다. 이때 교회가 복음을 절대화하는 것과 문화를 절대화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복음의 문턱이 불필요하게 높아진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말한 정신은, 복음의 본질을 붙들되 문화의 비본질을 양보하는 선교적 지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자신의 틀을 ‘absolutize(절대화)’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좁히게 된다고 경고하며, 의와 평강과
희락의 관점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부차적인지를 끊임없이 분별하라고 촉구한다.
은혜는 이 모든 실천의 심장이다. 은혜가 약해지면, 사람은 금세 자기 의를 세운다. 자기 의가 강해지면, 공동체는 쉽게 판단과 업신여김으로 기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 되는 유일한 통로를 “은혜의 재기억”에서 찾는다. 내가 어떤 죄인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 용서가 내 인생의
방향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실제적인 영성이다. 마태복음 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을
때 공동체가 어떤 어둠에 빠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교회는 용서를 설교하는 곳이기 전에, 용서를 연습하는 곳이어야 한다. 용서는 단지 과거를 덮는 기술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 주는 은혜의 방식이다. 용서가 사라진
교회는 결국 서로를 심문하는 법정이 되고, 은혜가 흐르는 교회는 서로를 다시 일으키는 병원이 된다.
이 은혜의 풍경을 가장 강렬하게 시각화한 예술 작품 중 하나로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을
떠올릴 수 있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 아버지가 무너진 아들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 장면은, 인간의 자격을 근거로 삼지 않는 복음의 품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 그림 한쪽에 서 있는 ‘형’의 존재다. 그는 질서와 정당함의 언어로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그 태도는 어느새
사랑의 축제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벽이 된다. 로마서 14장이
다루는 갈등도 이와 닮아 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 자유를 말하는 사람과 절제를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한 집 안에 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집의 중심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 아들이고, 너도 내 아들이며, 너희가 서로를 정죄함으로써 이 집을 쪼개지 말라.”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14장을 설교하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공동체는 바로 이런 ‘귀향의
집’이다. 누구든 회복의 길을 걸어 들어올 수 있고, 누구든 자신의 확신을 사랑으로 조율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서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는 집 말이다.
그렇다면 “형제를 넘어뜨리지 않는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결을 지녀야 하는가.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를 따라가 보면, 그 교회는 먼저 경청의 미덕을 회복한다. 상대의 입장을 설득하기 전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공동체, 상대의
양심이 어디에서 형성되었는지 묻는 공동체, 상대의 신앙여정이 어떤 상처와 기억을 지나왔는지 존중하는
공동체다. 경청은 단지 대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는 신학적 태도다. 그 다음으로 그 교회는 ‘자기
점검’에 능하다. 내가 옳을 수 있지만, 내 옳음이 언제 사랑을 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지 스스로 돌아본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덕을 세움인가, 아니면 내 자존을 세움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공동체의 화평인가, 아니면 내 입장의 승리인가?” 이런
질문을 놓치지 않을 때, 교회는 갈등을 파괴로 끝내지 않고 성숙의 계기로 전환할 수 있다.
또한 “형제를 넘어뜨리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변화 속도를 존중한다. 교회는 성화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에, 누군가는 빠르고 누군가는 느리다. 누군가는
어떤 습관에서 즉시 벗어나지만, 누군가는 오래 씨름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차이를 신앙의 등급으로 환산하지 말라고 말한다. 바울이
말한 약함은 멸시의 근거가 아니라 돌봄의 요청이다. 동시에 강함은 우월의 증거가 아니라 책임의 소명이다. 그래서 강한 자가 해야 할 일은 약한 자를 끌어올려 자기처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용납”의 의미다. 용납은
무조건적인 방임이 아니라, 사랑으로 동행하는 인내다. 교회가
이 인내를 배우지 못하면, 공동체는 정결을 지키려다 사랑을 잃고, 순결을
말하다가 사람을 잃는다. 반대로 교회가 이 인내를 배울 때, 공동체는
사람을 살리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결국 교회의 영광이 ‘갈등이 없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교회의 영광은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세상은 갈등을 힘으로 눌러버리거나, 승패로
결론짓거나, 상대를 취소해 버리거나, 아예 관계를 끊어 버리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길을 배워야 한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바울의 권면은, 교회가 분쟁을 대하는 태도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선언이다. 화평은 타협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조율이며, 덕을
세움은 약한 이의 회복을 목표로 삼는 사랑의 전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교회의 품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중시한다. 교회가 품격을 잃는 순간, 교회는
복음을 설명하는 기관이 아니라 복음을 가리는 소음이 된다.
이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님 나라로 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입장 표명으로 확장되지 않고, 우리의 사랑의 실천으로 가까워진다. 로마서 14장의 결론이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는 문장으로 귀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믿음은 단지 ‘내가 맞다’의 확신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사랑을 선택한다’는 결단이다. 어떤
선택이든 믿음으로, 곧 주님 앞에서의 양심과 이웃 사랑의 책임을 함께 안고 행해질 때 그 선택은 공동체를
살린다. 그러나 같은 행동이라도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혹은
상대를 눌러버리기 위해 행해질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결을 잃는다. 장재형목사는 그래서 교회가 늘 “의와 평강과 희락”의 표준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 의가
자라고 있는가, 즉 관계의 정의와 회복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 안에 평강이 자라고 있는가, 즉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존재가 되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 안에 희락이 자라고 있는가, 즉 은혜의 기쁨이 형식의
무게를 이기고 있는가.
로마서 14장을 다시 읽어 보면,
교회의 미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작은 배려의 축적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연약함 앞에서 한 번 더 참아 주는 말, 상대의 양심을 존중해 주는 한 번의 양보, 나의 자유를 사랑의 절제로 번역하는 조용한 선택,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 그 모든 것이 교회를 “형제를 넘어뜨리지
않는 교회”로 빚어 간다. 그리고 그 교회는 단지 내부적으로
평온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앞에서 복음의 실제를 증언하는 공동체가 된다. 세상은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살리는 방식을 보고 싶어 한다. 교회가 그 요청에 응답할 때,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공간이 된다. 장재형목사가 로마서 14장을 통해 거듭 호소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지 말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라. 형제사랑으로 실족의
돌을 치우고,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며, 은혜로 용서하고, 덕을 세움으로 공동체를 살릴 때, 교회는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복음은
다시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