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나온 한 문장은, 중한 관계 전반은 물론 한국 콘텐츠·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향방까지 함축하고 있다. 시 주석은 한한령(限韩令) 해제 요청에 대해 직접적인 약속 대신, “얼음이 세 자나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녹이는 데도 인내가 필요하다(冰冻三尺,非一日之寒,但化冰也需要耐心)”라는 성어로 답했다.

이 표현은 외교적 회피가 아니라, 중국식 현실 인식의 압축된 형태다. 한한령은 단순한 문화 규제가 아니라, 사드 배치 이후 누적된 정치·외교·여론의 결과물이며, 특히 중국 내 대중문화 관리 체계와 깊게 얽혀 있다. 따라서 그 해제 역시 ‘정상회담 한 번’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콘텐츠 규제는 정치가 아니라 ‘관리’의 영역이다.
중국에서 콘텐츠 산업은 경제 영역이면서 동시에 사회 관리의 수단이다. 영화, 드라마, 음악, 예능은 단순한 상업 상품이 아니라 가치관과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로 인식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한한령은 공식 문서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장에서는 명확하게 작동해 왔다. 한국 드라마의 판권 수입 중단, 한국 배우 출연 제한, 공연·행사 허가 지연 등은 모두 ‘정책 신호’의 결과였다.
시진핑 주석의 성어 발언은 이러한 관리 체계가 아직 완전히 풀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이는 한국 콘텐츠 산업에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한한령 해제를 단번에 기대하는 전략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전면 해제’보다 ‘부분 해빙’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중국식 해빙은 항상 단계적이다. 과거 사례를 보더라도, 문화 교류는 공식 발표보다 현장의 변화로 먼저 나타났다. 공동 제작, 플랫폼 협업, 간접 유통, 제3국 우회 진출 등은 이미 시험된 방식이다. 이번 정상회담 이후에도 K-콘텐츠의 중국 직접 진입보다는, 합작·협력·로컬라이징 형태의 제한적 완화가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주목해야 할 영역은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음악 IP와 같은 ‘비정치적 콘텐츠’다. 중국은 사회적 파급력이 상대적으로 낮고, 청소년 관리가 용이한 분야부터 점진적으로 문을 여는 경향이 있다. 이는 K-팝 대형 공연이나 스타 중심 드라마의 즉각적 복귀를 기대하기보다, 콘텐츠 포맷과 IP 단위의 협력을 모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내는 기다림이 아니라 전략이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준비하느냐가 핵심이다. 한국 콘텐츠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닫힌 문’이 아닌 ‘조정 중인 문’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 파트너와의 장기적 관계 유지, 검열 기준에 대한 현실적 이해, 현지 문화 코드에 대한 재해석은 모두 인내의 시간에 필요한 전략적 준비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경제·기술·문화 협력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점은, 콘텐츠 산업 역시 외교의 부속물이 아니라 경제 협력의 일부로 다시 편입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방식은 과거의 일방적 수출 모델이 아니라, 상호 관리 가능한 협력 구조일 것이다.
얼음을 녹이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한한령은 여전히 두꺼운 얼음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음의 존재 자체보다, 녹이기 위한 조건이 다시 논의의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시진핑 주석의 성어는 ‘아직 이르다’는 경고이자,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여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한국 콘텐츠·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이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인내의 시간은 공백이 될 수도 있고 준비 기간이 될 수도 있다. 얼음은 하루아침에 녹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이 맞다면, 해빙은 반드시 시작된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 방향이 다시 설정되었음을 알리는 첫 장면이었다.
윤교원 대표 / The K Media & Commerce, kyoweo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