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 담론에서 ‘회복’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가볍게 소비되고 있다. 성장률과 주가지수, 수출 통계가 반등하면 경제는 곧바로 정상 궤도에 오른 것처럼 포장된다. 그러나 그 수치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같은 시간, 같은 국가 안에서 누군가는 전례 없는 자산 증식을 경험하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생존의 문턱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 불균등한 회복의 구조를 우리는 ‘K자 성장’이라는 말로 부른다.

문제는 이 용어가 현실을 설명하는 동시에, 책임을 흐리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K자 성장은 마치 자연 현상처럼 묘사되지만, 그 갈라진 선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책은 선택의 결과이며, 시장 역시 중립적이지 않다. 위로 향하는 선에는 자본·기술·정보·정책 지원이 집중되고, 아래로 향하는 선에는 위험과 비용, 불확실성만이 전가된다. 플랫폼과 금융, 첨단 산업은 보호받는 반면, 자영업과 지역 경제, 노동 현장은 구조적 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불균형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K자의 위쪽에 올라선 집단은 더 많은 자원을 통해 다시 기회를 독점하고, 아래쪽에 머문 이들은 회복의 사다리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 과정에서 ‘노력 부족’이나 ‘적응 실패’라는 도덕적 언어가 동원되지만, 이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익숙한 수사에 불과하다. 성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 사회에서, 노력만을 강조하는 담론은 오히려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K자 성장은 결국 경제 문제를 넘어 사회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통계 속 호황과 체감 경기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제도와 정책, 나아가 공동체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경제는 좋아지고 있다”는 말이 위로가 아니라 분노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사회는 이미 깊은 균열 위에 서 있다. 성장의 숫자가 아니라, 누가 성장에서 배제되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 한 K자의 간극은 더욱 벌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성장 신화가 아니다. K자 성장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는 가장 무책임하다. 사회가 감당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의 성장을 보호하고 있으며, 누구의 추락을 묵인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위로 뻗은 선의 끝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결코 지속 가능한 번영이 될 수 없다. 공유되지 않는 성장은 번영이 아니라 균열이다.
















